1900년경 서울 수표교(현 청계천 2가)의 모습.
동국여지승람에는 “개천은 백악, 인왕, 목멱의 여러 골짜기 물줄기가 합쳐져 동쪽으로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러 3수구(水口)를 빠져나가 중량포로 들어간다”고 적고 있다.
개천은 서울 도성의 내부를 정확히 둘로 나누었다. 때문에 새로운 수도인 한양의 도시설계에 기본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 종묘, 사직, 주요 관청들은 모두 개천 이북에 들어서고, 이남에는 중하층 민가지대가 밀집해 공간적 이원질서가 자리 잡혔다. 개천의 본류는 도시를 동서로 관류한다. 반면 그 지류들은 대개 남북으로 흘렀다. 이 물길의 흐름에 따라 서울의 중소로는 남북 방향으로 건설되었다. 조선시대 개천은 도성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개천 북쪽은 우대(북촌)로 권력을 쥔 양반이, 남쪽 아래대(남촌)에는 몰락한 양반이나 장인·상인들이 거주했다.
1910년 무렵의 오간수문(五間水門).
청계천이 흐르던 그 시절 청계천 본류에는 광교, 수표교, 오간수문 등 10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광통교·수표교 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경교 아래를 아래대라 했는데 중촌은 광교 천변의 다방골, 수하동 등으로 말단관료·기술관료·시전 상인 등 중인들이 거주했다.
또 조선시대 개천은 민생의 현장이었다. 때로 정치 현안으로 대두되기도 했다. 정도전 등 현실적 경세가들이 지배하던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왕조의 수도 건설과 치수 등 정권의 수성(守成) 목적으로 개천을 활용했다. 태종은 지방의 장정 5만명을 동원해 개천의 본류를 일시에 만든 반면, 세종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그 지류와 세류를 개척했다.
세종 집권 후반, 개천은 명당수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개천이 경복궁 안으로 통하는 명당수(明堂水)이기 때문에 국운을 위해 깨끗이 하자”는 풍수론자들의 주장과 “풍수지리는 미신이고, 깨끗이 하려다 보면 천변의 민생 침해 우려가 있다”는 유학자들의 대대적인 반발이 부딪친 것. 이 논쟁에서 세종이 결국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후 개천은 조선 중기까지 방치되었다.
영·정조 시대 개천은 또다시 정치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300여년 동안 방치된 개천은 조금만 비가 와도 홍수 피해를 일으켰다. 보다 못한 영조는 8년여의 고민 끝에 준천(준설)을 결심했다. 영조가 오랜 시간 고민한 까닭은 민(民)을 동원한 준천사업이 그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재위 36년, 영조는 한성 부민과 고용인력 20여만명을 동원하여 두 달여 만에 준천 대역사를 완성했다.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영조는 민력 동원의 어려움을 후대 왕들에게 깨우쳐주게 하기 위해 준천사업의 처음과 끝을 적은 ‘준천사실(濬川事實)’이란 기록을 남겼다. 또 민(民)에게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는 계차 규정을 담은 ‘준천사절목(濬川司節目)’도 발간했다.
10월1일이면 우리는 땅 밑에 갇혀 있던 청계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물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복원될 청계천 전체 모습의 10~20%에 불과하다. 이후에도 청계천 복원사업은 계속돼야 한다. 현재 청계천 변의 도로도 청계천의 일부다. 이 부분에 대한 복원작업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또 광교, 수표교 문제 등도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이런 조치가 수반돼야 서울 르네상스를 노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