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정문 옆 문구사에 얼마 전 ‘껌 뽑기 자판기’(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으나 예전 ‘토이 크레인’과 흡사한 것이다. 인형에서 ‘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가 설치되었다. 동전을 넣고 집게를 조작해 바닥에 깔린 껌을 건져올리는, 약간의 사행성과 약간의 운, 오기를 조장하는 기계다. 게임을 한 번 하는 데 드는 돈은 200원,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세 번이 가능하다. 평소 껌을 씹는 습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껌 만드는 회사 주식을 소유한 것도 아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얼마 전까지 그 기계에 푹 빠져 있었다. 퇴근 무렵 일부러 편의점에 들러 지폐를 500원짜리 동전으로 잔뜩 바꿔 그 기계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뾰로로로롱, 집게가 움직일 때마다 울려퍼지는 기계음이 꿈속에서까지 들려왔으니, 확실히 문제는 문제였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으흠 새로운 기계가 들어왔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동전을 넣었다. 한데 첫판에서 그만 커다란 껌 한 통을 건져올리고 만 것이다(하여간 유사 이래 모든 비극은 그 ‘첫 끗발’에서 시작된다). 동전 두 개로 이마트 가격 2300원짜리 껌을 손에 쥐고 나니, 갑자기 내가 껌 만드는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더구나 마침 옆을 지나치던 초등학생 네댓 명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와, 이 아저씨 짱이다’ 하는 추임새도 넣어주었으니 아, 정말 난 짱인가 보다, 이제부턴 모든 일이 잘되려나 보다 하는 오해까지 덤으로 따라붙게 된 것이다.
첫판에 껌 한 통 달콤한 승리 ‘비극의 시작’
그날 이후 매일 몇천 원의 동전이 기계 안으로 쪼르르 굴러들어가게 되었다. 기계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수많은 껌들이 다 내 것이로구나, 이것들을 모두 뽑아내 국내 껌 시장 경기를 활성화해야지 하는 야심찬 마음과 달리 집게는 번번이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운 좋게 껌을 집어올리는 데 성공했더라도, 공중에서 집게가 한 번 흠칫 떨리는 순간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기계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듯하다. 공중에서 한 번 떠는 것.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배반하는 것). 후에 따지고 보니 평균 스무 번 정도 시도하면 껌 한 통을 뽑을까 말까 한 성적이었다. 이건 뭐 편의점에 가서 제 값을 주고 껌을 사는 것보다 못한 처지이니 온전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당장 그만둬야 마땅할 텐데, 문제는 내가 그렇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제는 단순히 껌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내 전 생애의 운이나 선택처럼 집게의 일거수일투족이 중요하고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겠다고 들여놓은 책상 위에 하나둘 껌통들만 쌓여갔고, 아내는 ‘이 사람이 무슨 부업을 시작했나?’ ‘껌에 관한 소설을 쓰나?’ 오해하며 슬쩍슬쩍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자정 무렵,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날도 술에 취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다, 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기계 앞에 섰다. 500원짜리 동전을 기계 옆에 탑처럼 쌓아놓고 열과 성의를 다해 버튼을 조작했지만, 맨정신에도 잡히지 않던 껌들이 잡힐 리 만무했다. 바닥에 깔린 껌들이 자꾸만 과일안주처럼 보여 괜스레 도리질만 여러 번 했을 뿐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에 택시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담배를 문 30대 초반의 택시기사 한 명이 내려섰다. 택시기사는 내 뒤에 서서, 전(前) 국가대표 최용수의 발을 떠난 축구공처럼 연신 헛방만 치고 있는 기계 속 집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짧게 한마디 했다.
▼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택시기사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굵고 낮았다. 나는 그 목소리에 눌려 얌전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놀랍도록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단숨에 세 통의 껌을 건져올렸다. 그가 쓴 동전은 달랑 500원짜리 두 개. 아아, 나는 곧장 그에게 무릎을 꿇고 싶었다. 무릎을 꿇은 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저 껌들이 필요하니 기술을 전수해주세요,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더듬더듬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이, 이게 무슨 기술이 따로 있나요?
택시기사는 껌통에서 껌 두 개를 꺼내 터프하게 입에 털어넣으면서 멀리 도로 끝에 서 있는 가로등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툭 한마디 던졌다.
▼ 한 번에 하나씩 잡으려 하지 마시고, 세 번에 하나를 잡는다고 생각하세요.
택시기사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어두운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복기했다. 한 번에 하나씩 잡지 말고, 세 번에 하나를 잡는다. 나는 그가 움직였던 집게들의 방향도 다시 떠올려보았다. 집게는 마치 껌통을 드리블하듯 천천히 입구 쪽으로 몰아, 최단거리에 자리잡았을 때 비로소 집어올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동안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지 않고 는적는적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로소 기계의 숨은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발생한 고시원 화재사고의 장본인이 월급의 대부분을 인형 뽑기에 썼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가 기계 속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그러면서 자신 또한 기계 속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집게에 들어올려졌다가 떨어지고, 다시 드리블했다가 입구 가까이까지 끌려가는…. 진정한 선택이 없는 세상에선 가짜 선택들만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그 가짜 선택들이 우리의 판단을 그르치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건져올리기엔 작금의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하기만 하다. 책상 위에 줄지어 늘어선 껌통들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나 역시 단지 껌통이었구나. 이 껌의 달큼한 첫맛이 나를 속였구나. 그렇다면 나를 집어올리는 집게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껌을 씹으며 오랫동안 곰곰 생각해보았다.
처음엔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으흠 새로운 기계가 들어왔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동전을 넣었다. 한데 첫판에서 그만 커다란 껌 한 통을 건져올리고 만 것이다(하여간 유사 이래 모든 비극은 그 ‘첫 끗발’에서 시작된다). 동전 두 개로 이마트 가격 2300원짜리 껌을 손에 쥐고 나니, 갑자기 내가 껌 만드는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더구나 마침 옆을 지나치던 초등학생 네댓 명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와, 이 아저씨 짱이다’ 하는 추임새도 넣어주었으니 아, 정말 난 짱인가 보다, 이제부턴 모든 일이 잘되려나 보다 하는 오해까지 덤으로 따라붙게 된 것이다.
첫판에 껌 한 통 달콤한 승리 ‘비극의 시작’
그날 이후 매일 몇천 원의 동전이 기계 안으로 쪼르르 굴러들어가게 되었다. 기계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수많은 껌들이 다 내 것이로구나, 이것들을 모두 뽑아내 국내 껌 시장 경기를 활성화해야지 하는 야심찬 마음과 달리 집게는 번번이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운 좋게 껌을 집어올리는 데 성공했더라도, 공중에서 집게가 한 번 흠칫 떨리는 순간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기계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듯하다. 공중에서 한 번 떠는 것.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배반하는 것). 후에 따지고 보니 평균 스무 번 정도 시도하면 껌 한 통을 뽑을까 말까 한 성적이었다. 이건 뭐 편의점에 가서 제 값을 주고 껌을 사는 것보다 못한 처지이니 온전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당장 그만둬야 마땅할 텐데, 문제는 내가 그렇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제는 단순히 껌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내 전 생애의 운이나 선택처럼 집게의 일거수일투족이 중요하고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겠다고 들여놓은 책상 위에 하나둘 껌통들만 쌓여갔고, 아내는 ‘이 사람이 무슨 부업을 시작했나?’ ‘껌에 관한 소설을 쓰나?’ 오해하며 슬쩍슬쩍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자정 무렵,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날도 술에 취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다, 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기계 앞에 섰다. 500원짜리 동전을 기계 옆에 탑처럼 쌓아놓고 열과 성의를 다해 버튼을 조작했지만, 맨정신에도 잡히지 않던 껌들이 잡힐 리 만무했다. 바닥에 깔린 껌들이 자꾸만 과일안주처럼 보여 괜스레 도리질만 여러 번 했을 뿐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에 택시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담배를 문 30대 초반의 택시기사 한 명이 내려섰다. 택시기사는 내 뒤에 서서, 전(前) 국가대표 최용수의 발을 떠난 축구공처럼 연신 헛방만 치고 있는 기계 속 집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짧게 한마디 했다.
▼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택시기사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굵고 낮았다. 나는 그 목소리에 눌려 얌전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놀랍도록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단숨에 세 통의 껌을 건져올렸다. 그가 쓴 동전은 달랑 500원짜리 두 개. 아아, 나는 곧장 그에게 무릎을 꿇고 싶었다. 무릎을 꿇은 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저 껌들이 필요하니 기술을 전수해주세요,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더듬더듬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이, 이게 무슨 기술이 따로 있나요?
택시기사는 껌통에서 껌 두 개를 꺼내 터프하게 입에 털어넣으면서 멀리 도로 끝에 서 있는 가로등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툭 한마디 던졌다.
▼ 한 번에 하나씩 잡으려 하지 마시고, 세 번에 하나를 잡는다고 생각하세요.
택시기사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어두운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복기했다. 한 번에 하나씩 잡지 말고, 세 번에 하나를 잡는다. 나는 그가 움직였던 집게들의 방향도 다시 떠올려보았다. 집게는 마치 껌통을 드리블하듯 천천히 입구 쪽으로 몰아, 최단거리에 자리잡았을 때 비로소 집어올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동안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지 않고 는적는적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로소 기계의 숨은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발생한 고시원 화재사고의 장본인이 월급의 대부분을 인형 뽑기에 썼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가 기계 속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그러면서 자신 또한 기계 속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집게에 들어올려졌다가 떨어지고, 다시 드리블했다가 입구 가까이까지 끌려가는…. 진정한 선택이 없는 세상에선 가짜 선택들만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그 가짜 선택들이 우리의 판단을 그르치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건져올리기엔 작금의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하기만 하다. 책상 위에 줄지어 늘어선 껌통들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나 역시 단지 껌통이었구나. 이 껌의 달큼한 첫맛이 나를 속였구나. 그렇다면 나를 집어올리는 집게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껌을 씹으며 오랫동안 곰곰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