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1

..

로맨스냐 스캔들이냐 간통의 위험한 줄타기

법적으로 불허하면서도 심리적으로 불륜 추구하는 양면성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11-13 14: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로맨스냐 스캔들이냐 간통의 위험한 줄타기

    대표적인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꼽히는 1995년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간통과 불륜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나누는 행위를 불륜이라고 말한다. 불륜이라는 말은 단어적 의미 그대로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결혼의 윤리란 무엇일까? 결혼식에서 신랑신부는 한 사람만 바라보며 평생 함께 늙어가겠노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선언의 속성이 그렇듯, 여러 사람 앞에서의 맹세는 그것이 그만큼 지키기 힘든 자기단속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생물학적 실험에서 증명되기도 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비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효는 짧기 때문이다.

    불륜이라는 명칭이 상대방에 대한 ‘신의’와 결혼에 대한 ‘정절’을 저버린 데 대한 윤리적 비난이라면, 간통은 법적 제재와 효력을 전제한다. 사회가 혼외정사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들은 이 범법행위를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어떤 작품도 배우자가 있는 남녀의 만남을 ‘간통’이라는 법률적 용어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금기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근본적 심리로 이야기되고 삶의 권태를 이겨내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법적으로 ‘간통’을 불허하면서도 심리적으로 ‘불륜’을 추구하는 양가성,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서양에서의 불륜은 부부가 사용하는 두 사람만의 침실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편이든 아내든 두 사람의 섹스 라이프에 제삼자가 침입하면 그것이 바로 정절의 위배고 불륜인 것이다. 언뜻 보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원칙은 똑같이 적용되는 듯싶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다른 섹스 파트너가 생기는 것을 불륜이라는 용어로 통칭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국 문화에서 혼외정사를 일컫는 불륜이나 간통은 특히 여성에게 엄격한 기준으로 적용된다고 하는 편이 옳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꽤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설마, 남편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고? 끄덕끄덕. 한국 멜로영화의 고전이 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960년대에 제작돼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리메이크됐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 신파극의 핵심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아버지에게 보내야만 하는 미혼모의 슬픔에 있다.

    불륜과 간통은 인간이 서로 만나 탐하고 섹스하는 데서 비롯된 행위



    법적 용어로 따지자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상황은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미혼 여성을 유혹했다는 점에서 혼인빙자간음이며,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여성과 섹스를 했으니 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간통이 아닌, 남겨진 미혼모의 순애보를 발견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간통의 주체가 바로 남성이며 피해자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피해자가 미혼모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남성의 아내로 살고 있는 여성,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 여성이야말로 이 치정극의 가장 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서사에서 알 수 있듯, ‘아내’는 이 아름다운 스캔들에서 조연 이상 차지할 공간이 없다. 남성의 불륜에 ‘아내’는 보조적 장치에 불과하다.

    가부장적 문화에 침윤된 한국에서 여성의 ‘불륜’이 주요 서사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의 문학작품이나 영화들은 여성의 불륜을 주로 단죄의 대상으로 삼았다. 은희경 전경린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30대 여성 작가들의 소설은 여성의 불륜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매일 아침 신문가판대처럼 별볼일 없는 일상에 갇혀 사는 여성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가부장제의 폭력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것, 그 선언으로 불륜이 선택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문화에서 여성의 불륜은 남편의 바람에 대한 응대의 성격이 짙었다. 전경린의 소설로, 후에 변영주 감독이 영화화한 ‘내 생애 하루뿐일 특별한 날’만 해도 그렇다. 남편의 정부(情婦)가 들이닥친 어느 날 밤 ‘스위트홈’은 여지없이 부서진다. 부서진 것은 집뿐만이 아니어서, 만신창이가 된 여성은 어떤 남성을 만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그리고 그는 이 만남을 불륜이 아닌 사랑이라고 부른다.

    간통과 불륜 사이의 간극 가운데 하나는 바로 로맨스냐 스캔들이냐 하는 관점의 문제일 것이다. 결혼은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에 지겨워진다. “가족과 섹스하면 그건 근친상간이야”라는 농담이 있듯, 부부의 결혼생활은 연애가 아니라 일상이다. 한마디로 자극적이지 않고 특별한 비밀도 없다. 불륜의 쾌감이라면 바로 비밀을 갖는다는 것일 테다. 모든 것을 공유한 부부에게 비밀만큼 갖기 힘든 것도 없다. 그런데 비밀이 없는 삶은 문고리 없는 문처럼 답답하고 밋밋하다.

    많은 영화들은 이 비밀의 순간들을 불륜이 아닌 로맨스로 호명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7일간의 사랑’처럼 말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몇십 년간 지속되던 일상과 달리 불륜의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며 짧다는 사실이다. 짧게 스쳐 지나가지만 속옷까지 적시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게 왔다가 사라진 만남, 그 사랑은 발효되거나 변질되는 시간을 거치지 않은 채 영원히 박제된다. 일상의 공기와 맞닿을 여유조차 없었기에 불륜의 순간이 영원의 추억으로 격상되는 셈이다.

    비밀이 갖는 힘은 사실상 불륜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배반과 위반 자체가 쾌감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의 이름이 금지됐기에 애타게 불렀듯, 결혼은 욕망을 단속하지만 부추기는 제도이기도 하다. 무릇 ‘불륜’과 ‘간통’은 인간이 만나 서로를 탐하고 섹스를 나눈 데서 비롯된 행위다. 법적 구속은 나의 아내나 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상속권과 혈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속성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과연 불륜이 간통으로 불린다고 해서 금지되거나 단속될 욕망일까. 오히려 간통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가부장제의 흔적이 아닐까. 씁쓸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제도의 허용 아래 당당히 ‘간통’하고 있을 남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