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두고도 중혼을 하겠다는 여주인공의 욕망은 여성상위 시대를 맞이하면서 남성들이 겪는 두려움과 가부장제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처럼 보인다.
구라다. 구라도 이런 구라가 없다. 이러다간 바퀴벌레에게서도 인생을 찾을 판이다. 그러나 모든 구라가 그렇듯, 구라는 그럴듯하면 그만이다. 인생이 바퀴벌레인지 아닌지 토론할 필요가 없다. 시작 자체에 답이 없었으니까.
그러한 면에서 박현욱 작가의 소설‘아내가 결혼했다’는 작가가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인생 구라의 어떤 경지가 있는 작품이다. 인생을, 섹스를, 연애를, 권력을 오직 ‘축구’ 하나로 은유하는 그의 소설은 기실 달콤쌉싸래한 중혼의 욕망에 공은 둥글다는 축구의 온갖 설을 섞어 만든 근사한 잡종 (그런 걸 포스트모던이라 하죠, 아마) 소설이었다.
블랙코미디 요소 가득 원작의 반도 못 따라가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한다. 감독이 작가 구라의 반도 못 따라간다. 영화가 소설의 시녀 노릇을 하고, 스토리 전달자에 그친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실수는 소설이 1인칭 시점이라고 해서 영화가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영화 내내 독백으로 처리되는 인생과 축구의 유비적 관계에 대한 배우 김주혁의 내레이션은 오히려 영화를 속속들이 맥빠지게 한다. 소설은 묘사의 재주를 부리는데, 영화는 설명에 머문다.
게다가 철저한 자유의 혼을 지녔고, 은근한 매력 폭발로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화신인 주인아 역의 손예진은 캐릭터의 볼륨감이 없어 납작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그녀는 그저 두 명의 남자를 갖고, 결혼을 했음에도 미혼의 정서와 생활을 그대로 이식한 못된 아줌마일 뿐이다. 영화와 소설의 핵심인 일부일처제에 대한 통쾌한 도발, 숨겨진 우리의 중혼에 대한 욕망을 후벼파는 그 도도함이 ‘샛서방 본 나쁜 년 감싸주기’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관계의 형평성에 대한 관객의 정의감만 자극한다.
대체 왜 ‘아내가 결혼했다’는 드라마의 공식을 쫓아갔을까? 두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상상 자체가 발칙하며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가득하지 않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10대 소녀에 대한 한 남자의 성도착적 집착으로 가득 찬 1인칭 소설이지만, 심지어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하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손에서 멋진 블랙코미디가 됐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매력의 화신인 주인아 역의 손예진은 캐릭터의 볼륨감이 없어 납작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그녀는 그저 두 명의 남자를 갖고, 결혼을 했음에도 미혼의 정서와 생활을 그대로 이식한 못된 아줌마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가 결혼했다’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발로 시작하지만, 둘 다 남성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남성 감독들의 영화라는 점이다. 즉 남성들 스스로에 대한 자조라면, 영화는 늙은 남성들에 대한 저잣거리의 농담처럼 좀 낄낄거리는 요소가 있어야 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아내가 결혼했다’는 반칙경기여야 했다. 현실을 모사하기보다,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정색하기보다, 현실을 조롱하면서 판타지의 영역에서 한바탕 놀아줬다면 관객들도 이 휘황한 구라에 몸을 맡겼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 역사에는 무수한 ‘아내가 결혼했다’ 류의 영화가 있어왔다. 사랑에서 삼각 연애의 문제,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는 무릇 자존심, 소유욕, 질투, 권력, 매혹의 드라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줄 앤 짐’이든, 그렉 아라키의 ‘키싱 투나잇’이든, ‘글루미 선데이’든 이 계열의 성공한 작품들에는 매혹과 질투의 파노라마가 숨을 쉰다. 또한 여주인공의 매력이 신성 불가하게 관객을 압도해야 관객들은 순순히 한 여자의 반이라도 갖겠다는 남자들의 뒤를 쫓아간다. 소설이 어떻든 영화는 보는 매체다. 아름다운 여배우보다 더 중요한 무엇. 그런 여배우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현재 우리 영화판의 비극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