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이 건조한 21만6000㎥급 LNG 운반선.
MIT 대학원을 다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한나라당 최고위원)는 이 거북선 모형 앞에서 ‘조선 입국(立國)’의 꿈을 키웠다. MIT에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꿈의 씨앗을 던진 인물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현대중공업은 1972년 3월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을 일구면서 출범했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해 지금은 조선, 해양개발, 엔진기계, 건설장비, 전기전자시스템, 플랜트 등 6개 부문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연구소만도 선박해양, 산업기술, 기전, 테크노디자인 등 4개 부문이 있다.
종업원은 2만5000명이다.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한 ‘범(汎)현대중공업 가족’은 4만4000명이다. 중소도시 인구와 맞먹는다. 대지는 945만5000㎡(286만평). 이 가운데 공장대지는 595만㎡(180만평)로 서울 여의도의 2배 넓이다. 공장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길이 300~400m, 폭 60~70m 크기의 여러 도크에서 건조되는 거대한 선박들이 눈에 띈다.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갑판 넓이는 축구장 2~3개와 맞먹는다. 갑판 위를 신속하게 점검하려면 자전거나 모터사이클로 다녀야 한다.
현대중공업의 조선 분야는 건조 능력뿐 아니라 실적, 경험, 수주량 등 모든 부문에서 단연 세계 1위다. 1983년 이후 건조량 기준으로 세계 정상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15%. 1차 협력업체 수는 약 600개, 2차 협력업체는 약 3000개다.
1, 2차 석유파동 때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체질 강화’
현대중공업의 지난해 매출액은 15조5330억원으로 2006년에 비해 24% 늘어났다. 창사 이후 최대 실적이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7507억원으로 전년 대비 100% 가까이 증가했다. 실속 있는 영업을 한 셈이다. 수출도 날개를 달았다. 2007년 수출 실적은 250억 달러로 역대 최다액이다. 5년 전인 2002년의 수출실적이 58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4배 넘게 증가한 쾌거다.
1974년 현대중공업이 최초로 건조한 그리스 리바노스사의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좌) 현대중공업이 설립되기 전 울산 미포만 전경(중). 현재의 현대중공업 전경(우).
1972년 조선소 건설에 나설 때만 해도 세계 조선경기는 호황이었다. 이듬해 말에 몰아닥친 제1차 석유파동 탓에 조선경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현대중공업은 원유를 실어 나르는 VLCC를 주로 건조하려 했으나 VLCC 주문이 급감하는 바람에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 중·소형선에도 눈길을 돌렸다. 또 조선과 연관이 있는 다른 사업으로 발을 넓혔다. 울산철공주식회사(현 한국프랜지), 수리조선소(현 현대미포조선) 등을 설립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함께 엔진생산을 서둘렀고 발전설비, 산업기계, 담수설비 등 플랜트사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창립 초기에 몰아친 태풍 때문에 오히려 기업 체질이 강화됐다.
1978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닥쳤다. 현대중공업은 품질관리, 생산성 향상이라는 정통파 해법으로 격랑을 넘었다. 그해 울산조선소가 준공되고 현대중공업은 국내 100대 기업 리스트에 들어갔다.
창업 10년을 맞는 1983년은 뜻깊은 해였다. 210만 총톤(G/T)의 선박을 신규 수주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전 세계 발주량의 10.7%를 차지하는 막대한 물량이었다. 그해 수출 실적은 14억 달러로 국내 기업 가운데 최초로 10억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 조선업체로 부상했다.
현대중공업은 1980년대 들어 기술집약형 체제로 변신을 꾀한다.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들려면 고급 기술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용접기술연구소를 세워 우리 실정에 맞는 용접기술을 개발하고 신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연구 영역을 확대해 로봇, 레이저 등 첨단산업 분야도 연구하면서 산업기술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연구소는 광(光)에너지원, 레이저 절단기, 용접기, 열처리기 등을 개발했다. 요즘엔 전문직 석·박사 200여 명이 모인 싱크탱크로 발전해 공장자동화, 환경산업, 신소재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선박해양연구소도 핵심 싱크탱크다. 권위 있는 학술단체인 국제수조(水槽)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예인수조, 회류수조 등 150종의 첨단설비를 갖추고 있다. 석·박사 등을 포함한 정예 연구진 160명이 머리를 맞대고 미래형 조선산업을 연구하고 있다.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만든 간판급 선박이 1994년에 완성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호인 ‘현대 유토피아’다. LNG 운반선을 건조하는 노하우를 쌓기 위해 14년간 용맹정진한 결과다. 프랑스, 노르웨이 등에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의 LNG 운반선은 호평 속에 주문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27척을 건조했으며 10척을 주문받은 상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1월 21만6000㎥의 세계 최대 LNG선을 건조했다. 미국 OSG사(社)에서 수주한 이 선박은 기존 LNG선에 쓰던 증기터빈엔진보다 효율이 40% 이상 높은 디젤엔진을 달았으며 첨단설비인 재액화(再液化) 장치도 갖췄다.
컨테이너 1만 개를 싣는 선박을 만드는 게 조선업계에서는 오랜 ‘로망’이었다. 현대중공업은 2005년 이 ‘꿈의 컨테이너선’을 중국 코스코사로부터 주문받아 2007년 8월에 인도했다. 이 건조기술을 바탕으로 컨테이너 1만3000개를 싣는 선박 8척을 지난해 9월 수주해 2011년 1~10월에 차례로 인도할 예정이다. 1만5000개를 실을 수 있는 컨테이너선도 개념 설계는 완성했다. ‘꿈의 선박’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셈이다.
바다 위 대신 뭍에서도 선박 건조 성공
조선업체의 규모는 누적 건조실적을 보고 가늠한다. 현대중공업은 창업 10여 년 만인 1984년 3월 선박 건조 1000만t을 달성했다. 그 후 1997년 3월엔 5000만t을, 2006년 초엔 세계 최초로 1억t을 넘어섰다. 이런 성장세는 1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 일본의 조선소에서도 넘보지 못하는 대기록이다.
건조 척수로는 창업 30년 만인 2002년 3월에 1000척을 달성했다. 창업 이후 45개국 235개 선주사들에게 넘겨준 선박은 모두 1330척이다.
올 5월 말 영국 클락슨이 발표한 세계 조선업계 수주잔량 순위를 보면 현대중공업은 1447만9000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은 538만6000CGT로 세계 4위, 현대삼호중공업이 469만2000CGT로 5위에 올랐다. ‘현대 브라더스’가 1, 4, 5위를 석권한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글로벌 리더-미래를 개척하는 현대중공업’이라는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그 뼈대는 각 사업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조선사업부의 의존도(현재 전체 매출 대비 45%)를 점차 낮춘다는 것. 대신 엔진기계, 환경 관련 사업, 기계 및 플랜트 부문을 키울 계획이다.
물론 조선 부문은 앞으로도 가장 핵심 사업이므로 더욱 부가가치를 높이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설계와 생산에서 고도의 안전성과 정밀도를 추구하도록 기술혁신을 꾀하고 차세대 첨단선박인 PLNG, LNG-FPSO, CNG 등을 개발할 계획이다. 여기서 얻은 노하우는 우주항공사업, 해양개발 분야에 응용한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전남 장흥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소(왼쪽)와 태양광 발전실비 공장 내부 모습.
현대중공업은 다양한 신성장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가운데 태양광과 풍력발전 사업이 돋보인다. 2005년 울산에 20MW급 태양광 모듈 공장을 세우고 태양광 발전사업을 시작했다. 유럽 시장에서 6000만 달러 규모의 태양광 발전설비를 수주했고 해남, 장흥 태양광 발전소도 짓는다. 올 5월엔 충북 음성군 소이공업단지 내 6만6000㎡(2만평) 대지에 340억원을 투자해 태양전지공장을 완공했다. 태양전지와 태양광 모듈을 각각 연간 30MW 규모로 생산한다. 내년까지 추가로 3000억원을 투자해 음성 제2공장을 세워 태양전지 생산을 연 330MW로 늘릴 계획이다. 제2공장이 본격 가동되는 2010년에는 약 1조원의 매출을 달성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군산 산업단지 내 13만 2000㎡ 대지에 1017억원을 투자해 풍력발전기 생산 공장을 설립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10년 2월 완공 예정인 이 공장은 연간 400MW 규모의 풍력발전기를 생산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은 ‘이동식 발전설비’를 개발해 발전소를 짓기 어려운 지역인 쿠바에 644기, 8억5000만 달러를 수출하기도 했다. 이 제품 사진은 쿠바의 10페소 신권 도안에 사용됐다. 쿠바의 정치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한국의 현대중공업을 본받으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스트로에게 격찬받은 이동식 발전설비 개발
현대중공업은 산업용 로봇 제작에도 일찌감치 뛰어들었다. 1985년 첫 로봇을 생산한 이래 지금까지 1만2000여 대를 생산했다. 현재 국내 시장의 40%를 점유한다. 2010년엔 2500여 대의 로봇을 생산해 세계 5대 로봇 메이커로 성장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3월 현대자동차의 체코, 베이징 공장으로부터 차체 조립용 로봇 559대를 수주했으며 올 4월에는 8세대 LCD 운반용 로봇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해 LG디스플레이에 로봇 100대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중공업은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최근 조선업의 호황으로 대규모 현금자산을 가진 현대중공업그룹은 보유 자산과 투자 유가증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올 7월에 CJ증권을 인수해 하이투자증권으로 출범시켰다. 또 장기적으로 선박펀드도 키울 계획이다. 독일에서는 선박펀드를 통한 선박 건조 비중이 70~80%에 이른다. 한국에도 2004년 선박펀드가 도입돼 현재 70여 개의 선박투자회사가 설립됐다. 세계 유수의 해운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한 현대중공업이 선박펀드에 진출한다면 수익 창출 시너지를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의 지속적 발전 요인에 대해 홍보담당 권오갑 부사장은 “임직원이 공동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조직문화 덕분”이라면서 “무분규 임단협 타결이 노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노사 평화가 형성된 지 오래다”라고 말한다. 경주 마라톤대회에는 민계식 부회장을 비롯한 수천명의 임직원과 가족들이 참가해 축제처럼 즐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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