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갈비 소금구이’
쇠갈비가 가족 외식의 주요 메뉴로 떠오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길게 잡아 30년이다. 쇠갈비집 역사는 경기 수원에서 시작한다. 수원에 화성 발안 출신의 이귀성 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라는 일본식 제과점을 운영했다. 광복 후 그는 ‘화춘옥’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해장국(갈비우거지탕)을 냈다. 해장국집은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더 돈벌이가 될 만한 메뉴가 없을까 궁리했고, 그렇게 해서 1956년 쇠갈비구이가 탄생했다. 식당 한쪽에 화덕을 만들고 여기에 길이 17cm 남짓의 커다란 쇠갈비를 구워 양재기에 담아 냈다. 손님들은 목로주점의 그것 같은 기다란 나무탁자에 앉아 종이로 쇠갈비뼈 양쪽을 잡고 갈비를 뜯었다.
수원 ‘화춘옥’이 원조집 … 비싸지만 고기 질은 천차만별
1956년이면 6·25전쟁이 끝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쇠갈비구이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뻔했다. 부자이거나 고급 공무원, 장군 정도는 돼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원보다는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와서 먹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몇 차례 다녀갔다고 하는데, 박 전 대통령이 오면 숯불 연기를 피워 다른 손님들의 눈길을 피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장사 잘되는 식당 옆에는 반드시 같은 음식을 내는 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10여 년 만에 싸전거리에는 화춘옥을 중심으로 20여 곳의 쇠갈비집이 밀집하게 됐는데, 1970년대 말 재개발이 되면서 모두 도시 전체로 흩어졌다. 이즈음 화춘옥은 무슨 까닭에선지 문을 닫았다(몇 년 전 20년간의 침묵 끝에 이귀성 씨의 손자가 화춘옥을 다시 열었다.)
이후에도 화춘옥의 명성은 이어졌는데, 화춘옥에서 주방 일 했다는 사람, 지배인 했다는 사람 등이 식당을 차려 스스로 화춘옥 갈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수원 토박이들이 꼽는 화춘옥 후계자는 1980년대에 문을 연 ‘화정식당’ ‘삼부자집’ ‘본수원갈비’ 등이다. 이 무렵 서울에도 유명 쇠갈비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업계 종사자들에 따르면 서울의 쇠갈비집 주방장들은 대부분 수원 갈비집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쇠갈비집 역사의 큰 줄기는 화춘옥에서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포천 이동갈비는 80년대 초에 시작된 음식이다. 이동갈비는 수원갈비와 달리 조각갈비다. 보통의 갈비 요리에서는 한 대인 것을 갈비뼈를 세로로 잘라 두 대로 만들었다. 이 조각갈비 10대를 1인분으로 계산한다. 이동갈비가 싸고 푸짐한 갈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한때 쇠갈비집은 극단적으로 비싸거나 싼 집으로 나뉘었는데 요즘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소비자들도 약아져 턱없이 비싸거나 싸면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전반적인 가격 평준화가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가 많다. 같은 값의 쇠갈비인데 질에서 차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고기 질을 믿을 수 있는 ‘벽제갈비’에 유혹되기도 하지만, 값이 비싸 온 가족이 맛있다고 먹어대는 날에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근래에 가족 외식으로 소문난 쇠갈비집 몇 곳을 갔다 번번이 실망하고는 취재수첩을 꺼내 그간의 갈비집 목록을 들추었다. 그래서 가격과 질 모두에서 만족할 수 있는 쇠갈비집 세 곳을 추렸다. 수원의 화춘옥, 수원농협에서 운영하는 갈비고을, 포천의 김미자 씨네 이동갈비집이다(이 칼럼 나가면 가족들이 쇠갈비 먹으러 가자고 또 난리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