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기계’(왼쪽), 김학량 ‘나무가 추는 어느 춤’.
인류 소통 해결하는 구조체로 재탄생
이들의 작업에 등장한 기계장치들은 단순한 재현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하면서 인류의 소통을 매개하는 구조체로 다시 탄생한 오브제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을 직조하는 또 다른 생명체로 등장한 ‘채널’인 것이다.
정재호는 어렸을 때 모형 비행기에 심취했던 기억과 웹상의 전투기 이미지에 착안한다. 그는 이를 폭력 미학을 구현하는 기계장치로 규정하고, 고전적 이미지와 텍스트의 공존을 시도했다. 부채 모양의 화면 안에 전투용 헬리콥터를 그려넣거나 문인화 포맷으로 F-15를 비롯한 여러 전투기를 재현한 것. 특히 문인화 포맷을 차용한 작품들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밑에 ‘F-22 스텔스기’가 ‘下二十二 密機’라는 식으로 제목이 붙은 텍스트부터 심상치 않다. ‘出於美國也(출어미국야)’ 등으로 시작하는 발문들 또한 예술에서 스타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맹자의 구절을 패러디해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식의 집요하고 철저한 연구조사 과정을 거친 이 작가의 감각과 인지는 가히 문과 예를 겸비한 옛사람들의 멋스러움을 되새기게 한다.
김학량의 기계장치들은 한결 추상도가 높다. 그는 고향 인근의 정동진을 방문했다가 폐구축함을 보게 된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관찰하고 기록한 그는 각종 계기판, 버튼 등 겉에 드러난 것들과 그 이면을 유기적인 네트워킹 시스템을 통해 유추한다. 그의 추상은 마치 한 그루의 풀꽃 도상을 떠올리게 한다. 동일한 콘텐츠일지라도 어떤 형식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예술적 맥락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만드는 것. 사유를 견인하는 형상의 발견과 배치, 구조화 등의 과정을 밟아나가는 김학량의 품새는 늘 매력적이다. 문학적 서사와 시각적 서사의 절묘한 결합을 드러내는 방식 말이다. 5월19일~6월1일, 갤러리도올. 02-739-1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