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식인상어에 대한 두려움은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섬뜩하지는 않다. 그러나 평소 사람의 어깨에 온순하게 앉는 새가 갑자기 인간을 습격한다면?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 같은 기이한 상황이 빚어내는 공포를 능숙하게 포착했기에 걸작 영화를 만들어냈다. 갑자기 인간에게 달려드는 새떼는 살인마나 괴수 유령이 아니지만-혹은 아니기 때문에-더욱 공포스럽다.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거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섭게 달려드는 새떼에게 둘러싸일 때,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는 공포는 ‘조스’가 주는 공포보다 더욱 깊고 섬뜩하다.
1970년대 화제가 됐던 영화 ‘스웜’은 벌떼의 습격을 다룬다. 여기서 벌은 인간에게 꿀을 공급해주는 일종의 ‘가축’. 한번 쏘이면 제법 고통을 주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이지는 않은 곤충에서 돌변해 인간을 무차별 살상하는 식인 집단으로 나온다.
이 영화에는 유명 스타가 그야말로 ‘벌떼같이’ 나왔다. 헨리 폰다, 마이클 케인, 캐서린 로스, 리처드 체임벌린, 리처드 위드마크, 호세 페러 등 당대 스타가 총출동했다. 그러나 이들 스타의 모습은 벌떼가 열차와 발전소 헬기를 파괴하고 추락시키는 모습, 사람들이 벌떼의 공격을 받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아비규환의 장면에 가려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새들이 돌변하고 식인 벌떼가 출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히치콕은 ‘새’에서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스웜’에서도 분명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요즘 같으면 기후나 환경의 변화 탓이라고만 하면 설득력을 얻지 않을까 싶다. 단지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 남미에서는 꿀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 원인을 놓고 환경 변화에 의한 것, 휴대전화 등에서 나오는 전자파 탓이라는 등의 지적이 나온다.
꿀벌이 좀 죽었기로서니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꿀벌의 떼죽음은 장차 생태계 파괴는 물론 식량 생산에도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과일 채소 등을 성장하게 하는 ‘수분’ 공급이 매우 어려워지는 탓이다.
꿀벌의 공격은 꼭 떼로 달려들어 독침으로 사람을 찔러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 스스로-타의에 의해서든-종족이 멸종해 인류의 식량 생산에 위기를 불러온다면 그것은 어느 스릴러보다 무서운 공포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