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간신히 겨우 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거지요.’
5월17일 타계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씨의 삶을 이처럼 잘 집약하는 말이 또 있을까. 이는 고인과 30여 년을 교유하며 살았던 농부 수필가 전우익 씨가 자신의 산문집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에서 소개한 것으로, 권씨가 직접 한 말이다. 전씨가 경북 울진군 불영계곡 돌투성이 산에서 자라는 적송 줄기가 한없이 아름다워 ‘저게 뭘 먹고살까’ 하고 고민하다 물어보자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도 줄기는 오색으로 빛나고 잎은 푸르기만 했던 그 적송처럼, 권씨도 극도로 청빈하고 겸손하게 살면서도 빛나는 작품과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줬다. 열아홉 살 때부터 결핵을 앓기 시작해 평생 오줌통을 달고 살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놀랍도록 따뜻하고 날카롭고 아름다운 글을 썼다. 미화된 이야기가 아닌, 리얼리즘에 뿌리를 두면서도 낙관적인 세계관을 담은 이야기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동심의 세계를 심어준 작가였다. 1969년 월간 ‘기독교 교육’에 발표한 단편동화 ‘강아지똥’은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던 강아지똥이 자신의 몸을 녹여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몽실 언니’ ‘강아지똥’ 등 주옥같은 작품 남겨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가 각각 60여 만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7평 남짓한 장난감 같은 오두막집에서 홀로 극빈의 삶을 살았다. 2005년 발표한 시에서 ‘70년을 살았지만 아직 양복, 넥타이, 돈가스, 피자는 가까이해보지 못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30촉 전구를 켜도 방이 어두우면 천장과 벽에 반사용 은박지를 붙여 좀더 밝게 하고 살았다. 깨진 도자기 베개를 주워 붙여 사용하고, 텔레비전도 없이 살았다. 아동문학가 김경희 씨는 “인간 성자처럼 사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북한 어린이 돕기에 5000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끼며 모은 돈이 상당한 액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 30억원이라는 얘기가 있어 유언장을 받은 정호경 신부에게 직접 물어보자 “그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어린이를 위해 남겼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 유언장은 31년간 교유해온 정호경 신부의 권유에 따라 고인이 죽기 2년 전에 미리 써둔 것으로, 그가 삶의 원칙으로 삼아온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잘 담겨 있으며, 삶에 대한 담담한 태도가 인상적으로 드러나 있다.
환생 꿈꾸는 유언장 동화 같은 순수한 마음권정생 선생은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뒷산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극빈의 삶을 살며 모은 돈은 어린이들에게 남겼다. 평생을 병마의 고통 속에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의 정신세계도 고스란히 남았다(왼쪽이 정현상 기자).
‘내가 죽은 뒤에는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라고 시작하는 유언장에는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라든지 ‘용감하게 죽겠다’는 글귀도 들어 있다. 심지어 사후의 일까지 유머러스하게 언급했다.
‘만약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이 눈앞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했다. 3월31일 1차 입원을 앞두고 그는 정 신부 앞으로 다시 유언장을 썼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나왔습니다.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 1초도 참기 힘들어 끝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하나님께 기도해주세요. 제발 이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싸우고,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 삶을 살았던 그의 빈소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유언장 수신인으로 지목된 정호경 신부, 최완택 목사, 박연철 변호사뿐 아니라 ‘권정생과 함께하는 모임’이나 아동문학가들, 동네 주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평소 아들처럼 따랐던 판화가 이철수 씨 부부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권 선생님이 화내신 적 있느냐고 물었는데 ‘정말로 한 번도 없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던 주민 권태천 씨는 “다른 분들이 권 선생님의 영면을 애석해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늘 옆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지낸 사람으로서 이제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 권정생 선생의 책 ‘비나리 달이네 집’에 실린 삽화.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은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어 번 왔지만 나는 대접 한번 하지 못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권 선생이 이 개를 끌어안고 임종을 지켰고, 그 다음부터는 개를 안 키웠다고 함) 헐떡헐떡거리다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끝이다.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 5.1 | |
권정생은 누구?
도쿄 빈민가서 출생 … 교회 종지기 16년
| 1937년 9월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광복 이듬해 한국으로 건너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던 그의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 그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다. 가족이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도 못 내 어머니가 행상을 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밥 짓는 법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 점원 노릇을 하며 살았고, 버려진 잡지나 신문, 동화 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지냈다.
권정생 선생은 ‘인간적 성자’로 살았다. 그의 베스트셀러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는 세대를 초월해 감동을 안겨준다. 1967년 일직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종지기로 16년을 살았다. 그 조그만 방에서 글을 썼다. 그는 생전에 기자와 만나 “그때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립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교회가 바라보이는 마을 위쪽 빌뱅이 언덕에 7평 남짓한 오두막집을 짓고 ‘몽실 언니’ ‘한티재 하늘’ 등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그가 죽은 뒤 오두막집을 두고 존폐 논란이 벌어졌다. 무소유자로 살았던 그가 자신이 죽으면 ‘집을 헐어 원상복구해 달라’는 뜻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권씨 누나와 동생 등 유족과 ‘권정생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은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 |
기자와 권정생 선생의 특별한 인연
신분 속이고 방문 … 사죄 기회 놓치고 마지막 배웅도 못해
| 기자가 그의 오두막집을 방문했던 때는 1997년 10월. 작고한 전우익 씨, 사진기자가 함께 갔다. 그는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기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있던 전씨를 졸라 나중에 양해를 구하기로 하고 서울의 중학교 선생인 척하며 찾아갔다. 그런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때렸다.
“요즘엔 뒤돌아보는 사람들이 적어요. 자꾸 앞만 보고 살아가요. 경쟁사회니까. 미래를 준비하자면 과거를 제대로 돌이켜보아야 하니더.”
“요새 아이들은 말을 잘 안 듣잖아요. 그저 칭찬 많이 해주고, 기다려주는 수밖에.”
“풍요로운 삶이란 새 한 마리까지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들끼리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건 더럽고 부끄러운 삶입니더.”
그가 직접 기른 감자를 삶아 내왔을 때 신분을 속인 것 때문에 맛있는 감자가 자꾸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돌아오면서 종종 찾아뵈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번쯤 오면 좋은 것만 보이는데, 자꾸 오면 나쁜 것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면 서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전화도 1년에 한 번만 하라고 했다. 내내 우스갯소리로 어색한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던 전씨는 돌아오는 길에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권 선생님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이 있니더. 첫째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는 사람이시더. 산처럼 바위처럼. 둘째 결코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아주 가난하게 살아요. 덜 먹고 덜 쓰고 덜 입어야 죄짓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셋째 무서울 게 없는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그분은 무서워할 줄 아는 분이시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조차 벽에 붙이지 못해요. 어머니 앞에서 쌀밥을 먹는 게 죄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울로 돌아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썼지만 끝내 부치지 못했다. ‘전우익 권정생 20년 교유기’ 기사가 나간 뒤 그의 전화를 받았다.
“세상 참 무섭습니더.”
기자는 용서를 구했으나 이미 늦었다. 언제고 한번 찾아뵙고 다시 사죄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다. 이 무서운 세상에 ‘낡은 책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방에서… 이 세상의 몇 됫박 소금으로, 손길이 남달리 따스한 이웃으로, 마음의 탑을 지성으로 쌓고 쌓으며, 저토록 푸른 불을 가슴마다 매달아준다. 불 밝혀준다’(이태수 시인의 ‘안동시편’)던 그는 이제 없다. 그래도 그의 뜻은 남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