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집하는 창의혁신 담당관실. 화사한 꽃무늬 벽지가 돋보이는 이 부서의 한쪽 벽면은 한 여직원의 제안으로 ‘창의 카페’가 됐다.
하지만 창의시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느끼는 ‘혁신 스트레스’가 행정 낭비를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창의시정은 자발적 참여가 원칙이지만, 상부의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공무원도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발된 아이디어가 오히려 행정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3만3000여 건 중 1000건만 실행
현재 서울시는 직원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개진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열어놓았다. 매월 각 국·부서 단위의 ‘창의 아이디어 및 사례 발표회’를 여는가 하면, 개인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상상뱅크’도 가동 중이다. 서울시 건설안전본부의 한 직원은 ‘세종문화회관 전면 계단에 조명분수(LED) 설치’ 등 무려 291건의 아이디어를 내놨을 정도다. ‘상상용광로’가 각 실·국 단위로 직원들이 관련 업무에 관한 창의적 생각을 교환하는 장이라면, 포털사이트 ‘천만 상상 오아시스’(www.seouloasis.net)는 시민, 전문가, 공무원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창구가 너무 많아 오히려 소모적”이라는 일부 직원들의 볼멘소리도 터져나온다. 다음은 서울시 한 7급 공무원의 전언이다.
“‘예산 절감’ ‘행복지수 높이기’ 등 매월 하나의 주제를 놓고 각 국·부서 단위로 ‘창의 아이디어 및 사례 발표회’가 열린다. 수많은 실·국이 여러 개의 아이디어와 실천 방안을 올리면 위에서 6~7개 실·국의 아이디어를 선정해 발표를 시키는데, 직원들은 이를 앞두고 상사에게 적어도 하나씩의 아이디어를 제출하느라 기를 쓴다. 물론 아이디어 건의가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부서도 있지만, 의욕이 강한 국·부서장들은 부하직원을 더 ‘쪼기’ 마련이다. ‘상상뱅크’에 개별 아이디어를 올리는 것도 의무는 아니지만, 다른 팀원이 참여하는데 나 혼자 내지 않으면 도태되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짜낸 ‘면피용 아이디어’가 남발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상상뱅크’에는 5월 중순까지 3만3000여 건의 아이디어가 올라왔다. 이 중 실행 단계에 들어간 아이디어는 1000건에 불과하다. ‘청계천에 프러포즈 장소를 만들자’ ‘잠수교를 폭포 속 교량으로 만들자’ 등 150여 건은 실행이 완료됐거나 진행 중이며, 나머지 850건은 예산 반영이나 관련 법을 정비한 뒤 추진할 계획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도입하기 어려운 상당수 의견에 대해서도 각 실무 담당자가 일일이 검토 답변을 달아야 했던 점이다. 이에 대해 직원들은 “불필요한 업무가 늘어났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 직원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시청이 구독하는 모든 신문을 끊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자’는 의견을 보고 (어떻게 답변할지)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7급 공무원 김모 씨는 “억지로 짜냈거나 뻔한 이야기, 허무맹랑한 의견에 일일이 검토 답변을 달다 보면 시민을 위해 써야 할 시간까지 낭비되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했다.
“‘창의시정’의 기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방법은 좀더 효율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강에 수상도서관을 건립하자’는 한 줄 건의에 실무 담당자는 도서관 건립 및 운영, 한강 여건 등 수많은 사항을 검토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실무 담당자에게 넘어오기 전에 먼저 ‘필터링 과정’을 거쳐야 ‘선택과 집중’ 면에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창의시정 시행 초기, 공무원들이 다른 업무 관련 아이디어를 집중적으로 제출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낼 경우 일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평가가 ‘기발한 사고’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1등급을 받은 아이디어가 정작 현실화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언론에 창의적 아이디어로 소개됐던 ‘남산 위에 인공 달을 띄우자’는 제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시는 ‘기술 한계와 엄청난 비용 때문에 인공 달을 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경직된 사고에 익숙한 공무원들에게 자유로운 상상력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실현 가능성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생긴 일이다.
일선 구청까지 앞다퉈 ‘제안 경쟁’
이렇듯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서울시는 얼마 전 창의시정에 관한 개선책을 내놓았다. “복잡한 평가체계는 좀더 단순화하고, 외부기관의 평가 업무를 강화해 평가의 객관성을 높였다”는 것이 창의혁신담당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는 “아이디어 평가에서도 실행 가능성의 비중을 늘릴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에 부는 창의·혁신 태풍은 일선 구청까지 점령했다. 노원구는 구청 가운데 최초로 창의·혁신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를 만들었으며, 강서구도 지역주민과 직원이 함께 참여하는 ‘창의구정추진단’을 구성했다. 종로구는 ‘창의와 혁신 뱅크’를 운영하고, 구로구는 ‘창의구정토론회’를 개최한다. 구청 직원들도 앞다퉈 ‘창의적 아이디어 제안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서울 일선 구청의 한 여성 7급 공무원은 “선배들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제출하도록 요구받는 말단 공무원들은 죽을 맛”이라고 전한다.
“서울시는 ‘창의’를,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는 ‘혁신’을 강조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각 부서별로 제출하도록 요구하는데, 그 시기가 겹쳐 문서 작성을 담당한 막내 직원은 야근에 시달렸다. 더구나 서울시가 강조하는 ‘창의’와 행자부가 말하는 ‘혁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일을 비효율적으로 반복하는 상황은 썩 혁신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창의시정은 전임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과 비견될 만한 오 시장의 주요 화두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 추진하는 우수 공무원을 우대하고 업무 태만·무능 공무원들은 ‘현장시정추진단’에 배치하는 오 시장의 ‘당근과 채찍’ 전략은 시키는 일에만 익숙했던 공무원의 유전자를 변형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직원들의 ‘창의 강박증’은 오히려 행정 낭비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불과 10개월 된 창의시정의 공과(功過)를 가늠하기엔 아직 이르다. 다만 서울시가 유념해야 할 원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창의성을 얼마나 현실에 잘 접목시키느냐’와 ‘직원들의 혁신 스트레스를 얼마나 생산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