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홍종희 씨는 “자기만의 교양 실루엣을 갖추려면 무엇보다 겸손한 태도와 왕성한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겉과 속이 다른 ‘천박한 속물’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제매너아카데미 김인석 원장(맨 왼쪽)에게서 와인과 테이블매너 관련 교양강좌를 듣고 있는 삼성생명 직원들.
이는 비단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 년 전 미국 뉴욕에서의 일이다. 어느 유명 금융계 CEO가 3000만 달러를 은행에 맡기기로 한 고객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스테이크 한 조각을 나이프로 찍어 입에 넣고, 혀로 나이프를 핥았다. 식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 고객에게서 “투자를 재고해봐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의 테이블 매너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차원에서 강좌 통해 교양교육 안간힘
특히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거래할 때는 에티켓, 상대국 문화와 관련된 지식 등이 거래 성사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뭘까. 비즈니스맨을 대상으로 교양과 국제 에티켓 등을 강의하는 국제매너아카데미 김인석 원장은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편안한 대화를 통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거나 사교 골프를 치면서, 또는 파티에서 비즈니스 상대와 그 직원이 속한 회사를 평가하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에티켓과 교양이 중요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생물학에서 말하는 상호정향이론 때문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린다는 거죠. 성장 배경, 교육 수준, 키, 머리카락 색깔 등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본성이며, 여기에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이 성향은 더 강해집니다.”
따라서 비즈니스맨들은 오늘도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와인, 미술품, 클래식 음악, 승마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교양 쌓기에 바쁘다. 조찬 모임으로 시작해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저녁이면 CEO 과정이나 교양 강좌, 와인 모임까지 참석하다 보니 파김치가 되기 일쑤다. 모 여성 CEO는 “밤늦게까지 각종 모임, 클래식 공연 등에 얼굴을 비치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골프 접대를 위해 골프가방을 챙겨야 한다”며 “나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또 없을 것이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의 기업들도 임직원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강좌를 마련해 교양 교육에 힘쓰고 있다. 삼성생명의 경우 ‘교양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직원 소양교육 때 와인과 테이블 매너 강좌를 꼭 포함시킨다. 5월21일 성남시 분당구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만난 삼성생명 직원들은 대부분 교양강좌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마산지점 정향곤 주임은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와인 관련 지식이 많이 필요하다. 강의 때 한 잔씩 마시면서 체험 교육을 받아 아주 유익했다. 음식물을 입 안에 넣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든가, 수프 먹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던 테이블 매너 강좌도 좋았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2년 전 직원을 대상으로 발간한 ‘하나인의 예절’ 소책자를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은행원에게 필요한 기본예절과 교양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이 책자에는 상갓집에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뿐 아니라 와인 매너, 정장 착용법 등 175가지의 다채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교양도 상품을 만들어내듯 ‘뚝딱’ 생산해야 하는 게 비즈니스맨들의 처지다. 그러나 문제는 교양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시일에 갖춰지지 않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유명 강사를 초빙해 단기간에 모든 것을 익히려 하고, 그렇게 익힌 약간의 지식으로 알은척하다 ‘천박하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양 쌓기가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4월 말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내 기업 CEO와 임원 4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4%가 “와인 관련 지식을 잘 몰라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와인 토털 비즈니스회사인 와이니즈 김정미 대표는 “와인에 대해 모른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 그러지 않아도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교양 쌓기가 스트레스라면 다른 탈출구가 없다. 무엇보다 와인을 즐겁고 재미있게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즉 소주나 맥주도 마시는 법을 배워서 마시는 게 아니듯, 와인도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즐겁게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문화를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와인을 포함해 요즘 교양의 ‘삼종신기(三種神器)’로 각광받는 분야가 클래식과 미술품이다. 클래식 공연장들이 전에 없이 넘쳐나고, 미술품도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진입 장벽이 만만치 않은 분야들이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교양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클래식 가운데서도 뭔가 더 고급스럽고 어렵게 느껴지는 오페라는 어떤가.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오페라 평론가인 박종호 씨는 “오페라는 결코 어렵지 않다.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공연장을 갈 경우 자막 쳐다보느라 정작 중요한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골프 연습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필드에 나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브레토(대본)를 한 번쯤 읽고 가면 오페라가 아주 쉽게 다가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서울시향 공연(왼쪽부터).
미술에 대한 이해도 속전속결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계훈 단국대 문화예술경영대 교수는 “요즘 남들이 미술품 투자다 뭐다 해서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니까, 자신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조바심을 많이 갖는 것 같다. 꾸준히 생활 속에서 문화환경을 조성해온 사람의 경우 자연스럽게 미술 교양이 쌓이지만, 단기간에 습득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다. 늦게 배우기 시작한 것을 자인하고, 꾸준히 훈련하면서 적응해나가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각 분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교양에 대한 접근 태도다.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홍종희 씨는 “자기만의 교양 실루엣을 갖추려면 무엇보다 겸손한 태도와 왕성한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겉과 속이 다른 ‘천박한 속물’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교양 쌓기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심리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을 감추려는 태도가 존재한다는 분석이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는 “교양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쌓이는 지식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편하게 배울 수 있는데, 그런 자신을 감추려는 것이 문제다. 스트레스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지적한다. 우선 이런 스트레스를 극복하기만 한다면 비즈니스 모임이나 사교 모임에서 은근히 풍겨나오는 교양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것은 시간문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