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종탑에서 바라본 이르쿠츠크 전경(왼쪽). 짙푸른 강물이 인상적인 앙가라 강.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바이칼호에서 서쪽으로 65km 떨어진 앙가라 강을 배경으로 세워진 도시. 1661년 탈영한 군인이나 체제에 반항한 양심수들의 수용소가 들어서면서 이르쿠츠크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기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몽골로 다시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한 창구 아가씨는 “달러는 받지 않는다”며 친절하게도 환전할 수 있는 곳까지 가는 법을 알려줬다. 그러나 몇 번 버스를 타라고 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키는 평균쯤 되는 우리(나와 동행자)보다 월등히 컸다. 이 정도 영어는 통하겠지 하며 건네는 모든 질문에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다행히 얼떨결에 수중에 들어온 100루블로 택시를 타고 앙가라 호텔까지 갈 수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환전했다. 게다가 친절한 한국인들까지 만났다. 이때의 안도감이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친구를 만난 것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르쿠츠크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었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거주지 등록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고, 이르쿠츠크를 여행하는 동안 머물 숙소도 결정했다. 여행정보도 쉽게 얻은 것은 물론이다. 역시 친구가 좋긴 좋다. 한국에 돌아온 뒤의 일이지만, 내 여행 동행자는 이날 인연으로 그 유학생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숙소는 우니베르스체스키 대학 근처에 있는 한국인 민박집이었다. 가이드북에 친절하게 소개된 호텔들이 있었지만, 낯선 동네에 떨어진 두 명의 ‘앨리스’는 일단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앙가라 강가와 알혼 섬, 리스트비앙카를 방문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이르쿠츠크 시내는 보기보다 그리 넓지 않아 걸어다니기에 좋은 도시다. 나무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거리를 다니는 팔등신 미인들은 조연배우가 돼준다. 물론 주연은 나다. 여름 햇살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네팔에서 고어텍스 점퍼를 벗지 못했고, 심지어 어떤 날은 머플러를 두르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온 것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꺼지지 않는다는 ‘영원의 불’을 지나 앙가라 강가에 도달하면, 짙푸른 강물이 러시아 사람들처럼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강가를 따라 ‘앙가라의 연인’들은 애정행각을 벌이고 산책 나온 할머니와 손녀, 스케이트보드로 재주를 부리는 젊은이, 유모차를 끄는 아줌마가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시장 구경이다. 이르쿠츠크에서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앙가라 강 반대편에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장 주변에는 색다른 느낌의 백화점과 로데오 거리라 불릴 만한 번화가가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고 세련된 물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화점 뒤쪽으로 큰 시장이 형성돼 있는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인 듯했다. 그곳에서는 생활필수품에서부터 멋내기용까지 각양각색 물건이 팔리고 있었다. 그중 눈길 끈 것은 러시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털모자였다. 조그만 얼굴에나 어울릴 법한 모자를 써보다가 결국 겨울에 필요할 가죽모자를 샀다.
석양이 물든 알혼 섬(왼쪽). 딸지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
허기진 우리는 근처 중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런 건물에 붉은색 한자로 간판이 걸려 있는 그곳은 우연히 만난 한국분이 알려줬는데 음식 맛이 예술이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나는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무덤가에 놓인 시든 장미 한 송이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즈나멘스키 수도원, 이르쿠츠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교회 종탑을 지나 트램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르쿠츠크 여행은 일주일은 아쉽고, 그 이상이면 좋겠다. 시외버스를 타고 리스트비앙카에 가서 바이칼 호수도 둘러보고 그곳에서만 잡히는 오물(청어 비슷한 생선)도 먹어봐야 한다. 환바이칼 열차를 타고 호수 주변을 돌거나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서 유유자적하는 즐거움도 만끽해야 한다.
며칠 후 우리는 ‘시베리아의 진주’인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그기 위해 알혼 섬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시베리아 관광의 핵심을 바이칼 호수라고 말한다. 이르쿠츠크 주와 브랴트 자치공화국의 경계에 자리한 바이칼 호수는 규모와 경관에서 단연 세계 으뜸이다. 남북 길이 636km, 최장 너비 79.5km, 최단 너비 27km, 둘레길이 2000km, 깊이는 1637m로 세계 최고의 호수다.
알혼 섬에서는 여행자 대부분이 ‘니키타의 집’에 머문다. 인터넷을 통해 예약할 수 있고, 방이 없을 때는 이곳에서 주변의 민박집을 소개해준다. 우리도 방이 없어서 ‘데니스의 집’을 소개받았다. 말 그대로 데니스 아저씨가 살고 있는 집에 머물게 된 것이다. 식사와 시설 이용은 ‘니키타의 집’에서 하고 잠은 ‘데니스의 집’에서 자며, 현지인들의 실제 생활을 엿볼 수 있어 행복했다.
낡은 통나무집 대문을 열고 나오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에는 바이칼 호수가 펼쳐진다. 세상 근심일랑 깊고 깨끗한 호수에 모두 던져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밤이면 쌀쌀해져 페치카에 불을 피워준다. 나무 타는 소리가 낭만적인 음악처럼 들리며 방 안을 훈훈하게 해준다. 그래도 아쉬워 손전등 들고 호숫가 언덕에 오르니 별들이 출렁인다. 마치 바이칼 호수처럼.
그곳에선 시간이 멈춘 듯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방에 앉아 그리운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고, 찌뿌드드한 날에는 자작나무를 들고 들어가 몸을 두들기며 러시아의 반야 사우나를 즐겼다. 햇살 좋은 오후에는 호수에 발을 담갔다. 알혼 섬에서는 ‘와직’이라는 러시아 차를 타고 섬을 다이내믹하게 돌아보거나, 자전거를 빌려 섬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도 알혼 섬이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알혼 섬을 나는 마냥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