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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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깔고 추억 덮고 ‘달빛 하룻밤’

  • 글·사진=허시명/ 여행작가 storyf@yahoo.co.kr

    입력2003-11-13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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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 깔고 추억 덮고 ‘달빛 하룻밤’

    전주 한옥마을 풍경.

    한국처럼 아파트로 뒤덮인 나라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내가 누워 있는 안방의 침대, 그 아래위로 똑같은 위치에 사람들이 누워 있다고 생각하면 잠이 다 확 깬다. 연탄 아궁이에 외풍 센 개량 한옥이나마 한옥에서 살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툇마루가 있고, 다락방이 있고, 마당이 있고, 마당 한쪽에는 개집까지 있는 그런 나지막하고 따뜻한 공간이….

    옛날 집이 그리워 가족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갔다. 우리는 전주 한옥생활체험관을 숙소로 잡았다. 전주시에서 공들여 지은 전통 숙박업소다. 때마침 보름날이어서 그곳에서는 ‘십오야 행사’를 하고 있었다. 십오야 행사는 입장료 1만원만 내면 물국수를 맛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랑채에서 벌어지는 공연과 뒤풀이 술상까지 즐길 수 있는 아주 소박하고 살가운 행사다. 그날은 산조공연이 열렸다. 등장하는 소리꾼은 당대의 명창은 아니었지만 전주에서 나고 자란, 명창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대학생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부채를 탁 접었다 펼치며 이마에 땀이 솟도록 열창하는 모습을 보는 사이 마당에는 어둠이 깊어지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솟았다. 뜰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투호(옛날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즐겨 하던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넣는 놀이)를 한다, 갓과 두건을 쓰고 임금놀이를 한다, 먹을 갈아 두루마리 한지에 붓글씨를 쓴다, 하며 재미나게 놀던 아이들도 마당 가득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랑채 마루로 기어 올라와 턱을 쳐들고 공연에 빠져든다. 공연이 끝나자 사랑채 마루에 수많은 작은 술상이 차려졌다. 전통주 한 잔에 콩전, 콩나물, 김치 등 전주 사람들 솜씨다운 ‘여간 아닌’ 손맛의 안주들이 올라온 술상이다. 이쯤 되면 1만원을 내고 참가한 것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전주 사람들다운 상업적이지 않은, 멋과 자존심이 깃든 자리다.

    한옥생활체험관에서 숙박하는 손님에게는 이 십오야 행사를 즐길 수 있는 특전이 그냥 주어진다. 하지만 매달 보름에 이 행사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골목길 곳곳 조상의 ‘숨결’ 가득

    그리움 깔고 추억 덮고 ‘달빛 하룻밤’

    가람 선생의 거처였던 ‘가람다실’.오목대로 소풍 온 학생들(왼쪽부터).

    전주는 경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도시여행을 할 만한 곳이다. 우람한 나무들이 넓고 짙은 그늘을 드리운 경기전(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사적 제339호) 마당을 걷다 한옥들이 밀집한 교동과 풍남동을 거닐면 문득 내가 지나간 시간 속에 잠시 스며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그리고 그런 착각이 들 때 이곳이 바로 전주구나 싶다. 전주 교동과 풍남동에는 800여채의 한옥이 있다. 전주시에서 한옥지구로 지정해 집수리를 제한하고, 필요한 수리비를 제공하고 있다.



    초저녁에 산책에 나섰는데 아이들이 신기한 걸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와! 진짜 골목길이다.” 차가 못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 입구에 서서 작은아이가 하는 소리다. 진짜 골목길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란다. 놀란 아이를 보며 우리가 더 놀랐다.

    이곳 전주에는 일반에게 개방된 또 한 채의 유서 깊은 한옥이 있다. 전주향교의 부속건물인 ‘양사재’다. 말 그대로 선비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전주향교는 조선시대 호남 땅에서 가장 큰 향교였다. 전주 이씨 왕가의 고향땅이라서 그럴 것이다. 양사재는 ‘오목대’ 바로 아래에 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1380년에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 들러 전주 이씨 집안 사람들과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 곳이다. 원래 양사재 자리에는 오목대 사우(祠宇·따로 세운 사당집)가 있었는데, 1875년에 양사재가 건립되었다. 이곳 양사재에서 1951년부터 1956년 사이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기거했다.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가람다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방에서 집필하던 선생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난초와 시와 술을 좋아했던 가람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집이라, 양사재의 느낌은 각별하다.

    양사재에서는 이곳을 운영하는 이들이 직접 따고 볶은 차맛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양사재 뒤편 오목대 산자락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키우고 따 먹었을 차나무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이곳이 차나무 자생지로는 북방 한계선이란다.

    그리움 깔고 추억 덮고 ‘달빛 하룻밤’

    전주 한옥생활체험관 사랑채와 마루. 양사재 전경(왼쪽부터).

    양사재나 한옥생활체험관 모두 화장실은 깔끔한 양식 변기다. 그러나 한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외풍 탓에 코끝이 시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호지 문 사이로 아침볕이 들 때쯤 일어나 고운 모래가 서걱거리는 뜰을 걷는 맛 또한 각별하다. 두 한옥집에서는 아침밥을 준다. 작은 놋그릇들마다에 정갈한 찬들이 담겨 있는, 굳이 따지자면 칠첩반상도 부럽지 않은 융숭한 아침상이다.

    참, 전주에는 이곳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렵지 싶은 또 다른 재미있는 풍속도가 있다. 전주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슈퍼마켓에 ‘가맥’이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가맥’은 가게 맥주의 준말이다. 가게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줄여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 길가에는 꽤 규모가 큰 가맥집들이 눈에 띈다. 명태포와 갑오징어 안주도 맛있고, 사람이 많아 닭장 속처럼 왁자지껄한 게 기분까지 즐거워진다. 어려운 서민경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트레이닝복 바람에 슬리퍼 끌고 나와 한 잔 걸칠 수 있는 여유가 한가로워 보이기도 한다.

    가맥에서 맥주 한 병 들이켜고 들어와 여닫이 문고리를 걸고,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피해보려 이불을 있는 대로 덮어쓰고 누우면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어른어른 추억들이 지나간다. 오랜만에 어릴 적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추억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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