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위).불법이민을 경계하는 표지판.
미국 남쪽 멕시코와의 접경지대는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 서쪽 끝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동쪽 끝 텍사스주 엘패소까지 이어지는 국경엔 담장이 둘러처져 있고 적외선카메라와 동작감지기가 작동 중이다. 그러나 제대로 서류를 갖춘 미국인이나 멕시코인들에게는 국경이라고 할 것도 없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무사통과다.
문제는 밀입국자들. 이들은 좋은 길을 놔두고 사막을 통과한다. 미국 애리조나주 소노란사막이 이들의 통로다. 밀입국자들이 이 사막을 통과하려다 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하루 평균 한 명이 이곳에서 죽어간다. 미국 국경수비대가 밤에 사막을 이리저리 오가는 밀입국자들의 움직임을 적외선카메라로 지켜보고 있다가 한꺼번에 붙잡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한다. 9·11 테러 직후 미 정부가 국경수비대를 지원할 인력과 무기를 긴급 배치한 것도 밀입국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길잡이 브로커 ‘코요테’들 기승
국경마을에서 요즘 새로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막길을 걷는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올 9월 말까지 밀입국하다가 걸려 본국으로 송환된 17세 이하의 멕시코인은 9800명이 넘었다. 지난해 1년간 9900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그중 13세 이하는 지난해 1300명에서 올 1∼9월에는 1500명으로 늘었다.
미국 언론에 소개된 호세(8)와 세르히요(6) 형제도 그런 아이들이다. 이들 부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산다. 현재 불법체류자 신세다. 여행 또는 방문 비자를 받아 미국에 들어와 눌러 사는 경우다. 신분은 불안하지만 어쨌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고 집도 장만했다. 그러자 고향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 났다. 이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처음 올 때처럼 밀입국 브로커들에게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두 아이를 밀입국시키는 데 드는 경비 5000달러가 ‘코요테(사막에 사는 갯과 동물)’라는 별명이 붙은 밀입국 브로커들에게 건네졌다. ‘코요테’는 두 아이가 자신의 조카라는 위조서류를 들고 8월 어느 날 사막을 건너다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코요테’는 점조직으로 연결된 다른 ‘코요테’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체포 사실을 알렸다.
멕시코 영사 미구엘 에스코바르가 두 아이를 국경 부근의 수용소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에스코바르 영사에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다음날 아침엔 식사도 하지 않았다. 국경을 건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세르히요는 “무섭지 않았다”면서도 “사막을 걷는데 다리가 휘청거려 엄마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며칠 뒤 아이들의 할머니가 수용소를 찾아와 아이들을 찾아가면서 “다시는 밀입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스코바르 영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살기 위해 얼마 뒤 또 다른 ‘코요테’와 함께 두 아이가 사막길을 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
멕시코보다 더 남쪽에 있는 나라의 어린이들 중에는 더 힘든 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멕시코를 통과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엘살바도르 출신으로 미국 워싱턴 근교에 사는 히고베르토 센테노는 ‘코요테’에게 아들 엠마누엘(11)과 딸 마리아 이바니아(6)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과 계속 떨어져 살다가는 결국 남의 아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비는 1만 달러. 그러나 멕시코에서 버스에 타고 있던 이들은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부모가 직접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야 한다는 정부방침 때문에 센테노씨가 엘살바도르로 날아가서야 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아이들을 5주 만에 고향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센테노씨는 지금 미국으로 돌아갈 일을 걱정하고 있다.
미국행에 나섰다가 멕시코에 붙잡혀 있는 남미 여러 나라의 어린이가 현재 2900명이나 된다. 미국 밀입국을 노렸다가 고생하는 어린이들이 많아지자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 등 국제기관이 나서 엘살바도르에서 ‘밀입국은 위험하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같은 취지에서 ‘내 손자를 낯선 이에게 넘겨버렸다’는 제목의 만화책도 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센테노씨는 “아이들을 미국에 데려오지 못해 한스럽다”면서 “남들 다 하는데 재수가 없어 걸렸다”고 재도전 의지를 꺾지 않는다.
이처럼 최근 어린이 밀입국이 성행하는 것은 미국이 불법체류하는 남미인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기 때문. 미국 애리조나주 국경도시 더글러스의 밀입국단속반 차장 조셉 그린은 이에 대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10년간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2000마일(3200km)에서 밀입국 단속을 강화한 이후 새롭게 나타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특히 9·11 사태 이후 더 두드러진 양상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불법체류자 사면 연방의회 상정
과거에는 적법한 서류를 갖추지 못하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남미인들도 1년에 한 번꼴로 고향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오거나 또는 미국 내에서 기반을 잡으면 할머니 손에서 길러지던 아이들을 데려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길이 막혔다. 미국 내 불법체류자들은 미국에서 직장을 잡기도 어려울 뿐더러 여유가 생겼다 해도 고향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려다 비자문제나 과거에 적법한 체류기간 이상 체류한 사실 등이 드러나면 공항에서 추방당하거나 미국 조국안보부의 조사를 받는 등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예 미국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한다.
이 때문에 ‘코요테’라고 불리는 밀입국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코요테’들의 본거지는 멕시코의 국경도시 아구아 프리에타. ‘코요테’들은 호텔 부근을 서성이며 남쪽에서 버스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밀입국 후보자를 찾는 것이다. 사막을 함께 통과할 ‘코요테’들은 전과가 없고 출입국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야 만약 적발돼도 구속을 면할 수 있다. 실제로 올해부터 밀입국 주선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지만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유죄를 시인하고 한두 달 구류를 살다가 풀려났다.
사실 미국이 이민 문호를 좁혀놓았지만 밀입국은 계속돼왔다. 지난 한 해 동안 45만명의 멕시코인들이 불법으로 미국에 입국했다고 주장한 멕시코 이민전문가도 있다. 미국 인구가 지난해 100만명 증가했는데 그중 절반 가량이 법적 지위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란 추정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결과 올해 미국에서 멕시코로 공식, 비공식으로 송금된 금액은 관광수입보다 많아 14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다. 이는 멕시코의 외화 수입원으로는 원유 판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다.
현재 미국 내 불법체류자는 1000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최근 불법체류자에 대한 각종 사면법안이 연방의회에 상정돼 이들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전혀 적극적이지 않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최근 히스패닉계 TV 방송 ‘텔레 문도’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정부방침은 “현 정부는 내년 대통령선거 전까지 불법체류 노동자에 대한 사면 등 이민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2001년 테러 사건 여파와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민법 개정을 위해 의회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법 개정이 아닌 이민규정 변경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덧붙여 불법체류자들이 한 가닥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여지는 남겨놓았다. 의회에 상정된 2개 법안이 통과되면 이중 100만명 가량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