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성당의 천장화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중 일부.
흔히 벌거벗은 상태와 부끄러움, 즉 수치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붙어다닌다. 에로티시즘의 속성을 논할 때 ‘벌거벗기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상대방을 벌거벗김으로써 원시상태로 돌아가게 하여 수치심을 유발하고 모독함으로써 얻는 쾌감은 에로티시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런데 초기 에덴동산에서는 벌거벗은 상태가 어떤 수치심도 유발하지 않았다. 벌거벗기기를 통하여 상대방을 모독함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 이르러 상황이 급전되고 만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상태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몸을 가린다. ‘치마를 하였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와 여자는 특히 자신들의 하체가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어떤 기독교 종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치마로 하체를 가린 것은 두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여호와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가 다름 아닌 성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성행위는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에만 집착한 성적 결합을 뜻한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성행위에 국한하여 해석하는 것은 그 명령에 함축된 것을 형해화(形骸化)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창조주와 인간 사이 질서를 깨뜨린 결과 성적으로까지 타락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창조주와의 관계가 깨져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나서 맨 처음 갖게 된 것이 성적 수치심이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보더라도 성적으로 타락하고 나서 성적 수치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수치심은 우리의 본능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신앙심으로 자식을 제단에 올린 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도 이복누나인 사라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는 이상한 거리낌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너무 소심하다고, 우리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을 무기력과 복종 때문에 숨기고 있다고, 그리고 본질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손에서 빠져나가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 또다시 떠나야 한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에 대해 가장 집착하고 동시에 가장 초조해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사회일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성에 관한 이야기를 용감하게 하는 사람의 심리에도 성적인 수치심이 깔려 있다는 분석은 귀기울일 만하다. 서갑숙이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책을 통해 과감하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구보다 성을 담론화하는 데 앞장섰던 마광수도 더 이상 성에 관한 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토로한 것 역시 본래적인 성적 수치심과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원시공동사회에선 근친결혼 예사
마약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성적 수치심을 없애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들은 대개 수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한’ 초기의 에덴동산이 아니므로, 우리에게 있는 성적 수치심을 교묘한 합리화로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의 하나로 받아들여 자신을 지키는 경계로 삼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성서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비로소 성행위를 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인간의 성행위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성적 쾌락을 통하여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가인은 영어의 ‘게인(gain)’과 같은 말로 ‘얻었다’는 뜻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잃고 가인을 얻었다. 그런데 이 가인이 아우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이고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가인은 에덴동산 동편 놋 땅에 기거하면서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다.
여기서 가인의 아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세상에는 아담 가족밖에 없는데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성서의 기록대로라면 가인의 아내는 가인의 여동생인 셈이다. 원시공동사회에서는 여동생이 아내가 되기도 하고 누나가 아내가 되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어원적으로도 ‘누나’라든지 ‘마누라’ 같은 단어는 눕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경상도 남자들은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는 경우 “마, 누라!” 하면 상황 끝이다.
우리 인류는 어차피 근친결혼의 산물이다.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동성동본간 혼인을 금지해왔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도 이복누나인 사라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인류학적으로도 가인이 여동생과 결혼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현대의 가족관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이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 이중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2절 사이에 사탄의 타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카오스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창조되었던 인간들도 타락하여 여호와는 아담이라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여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담마저도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함으로써 여호와의 계획이 크게 차질을 빚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아담인 예수를 보내야만 했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아담이 창조될 때 세상에는 여러 인종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인은 그 인간들 중 한 여자를 택하여 아내로 삼았으니 근친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창세기 1장 1절은 1장 전체의 제목에 해당하고, 2절은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초기 상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현대인이 인정하기 어렵더라도 가인은 여동생과 결혼한 것이 틀림없다. 아담은 가인의 아버지인 동시에 장인이 되고, 하와는 가인의 어머니인 동시에 장모가 된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하나의 신화로 여기는 사람들은 가인이 여동생과 결혼했느냐, 다른 집 여자와 결혼했느냐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신화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만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인간의 성행위가 원래 계획된 대로 여호와의 축복 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죄악의 씨를 낳기 위해 처음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가인은 여동생과 성행위를 하게 된다. 하긴 아담은 자기 살과 뼈와 성행위를 했다.
이와 같이 성행위의 부정적이고 불가해한 측면이 인류 역사 초기부터 부각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성에 대한 창조주의 축복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호와가 가인에게 벌을 내리면서도 이마에 표를 주어 죽임을 면케 한 것처럼, 성에 대해서도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주어지고 있는 셈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부정과 긍정, 저주와 축복 사이에 걸친 외줄 위에 놓여 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 외줄을 위태롭게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