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생가터(위). 조용필의 부모 묘와 부인 묘소.
‘오빠 부대’의 전설을 만들어낸 가수 조용필에게는 이렇듯 다양한 수식어와 찬사가 따라붙는다.
조용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충분한 음악교육을 받고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니다. 순전히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누구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란 것이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면 제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그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에는 노력과 재능 이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다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라는 글에서 풍토를 하나의 요인으로 꼽았다. 소위 인걸지령론이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생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답사지가 되곤 한다. 풍수학자 박시익 교수(영남대 환경대학원)는 금년 초에 미국의 역대 대통령 생가들을 답사한 뒤 필자에게 답사 소감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생가들은 전체적으로 평지에 있으나, 평지에서도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龍) 위에 터를 잡았음이 분명하다.”
용은 풍수 용어로 산 능선을 말한다. 높은 산 능선뿐만 아니라 논두렁 밭두렁과 같은 작은 능선들도 용이라 부르는데, 이 용을 따라 지기(地氣)가 흐른다고 한다. 평야지대에서는 용을 중시하는 반면, 산간지대에서는 용뿐만 아니라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는 주변의 산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주변의 산들을 흔히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라고 한다.
조용필의 생가는 경기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에 있다. 생가는 없어지고 주인이 바뀌어 새 집이 들어서 있다. 오랫동안 이 마을 이장을 맡았던 이만희씨(62)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조용필의 윗대는 대단한 부자였다고 한다. 정미소까지 갖고 있는 큰 부자였는데 부모 대에 이르러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조용필이 가수로 유명해지자 많은 지관들이 생가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다. 지관들은 조용필 부모 대에서 가세가 기운 까닭이 이곳 집터가 소의 ‘길마’ 형상인데, 한쪽으로 짐이 너무 많이 실려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길마’란 짐을 싣기 위해 소 등에 얹는 안장과 같은 도구를 말한다. 짐을 조금 실었을 때에는 좌우 균형이 잡히지 않아도 괜찮지만 짐이 많아지면 한쪽으로 기울어지듯 이런 ‘길마’ 형상의 터의 경우 재산이 적을 때에는 상관없지만 점차 재산이 많아지면 급격히 가세가 기운다고 한다.
지형지세로 보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집터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어떤 이는 이곳 생가터를 쌍정마을 전체 속에서 살펴보면 ‘바람에 휘날리는 비단 띠(풍취라대형·風吹羅帶形)’ 모습이라고도 한다. 대개 마을을 감싸는 좌우 산능선(청룡/백호)은 마치 두 팔로 아이를 안는 듯한 모습이지만 ‘풍취라대형’에서는 두 팔(비단자락)이 흔들거리는 모습이다. 조용필 생가는 바로 두 팔 가운데 오른쪽 팔 중간의 꺾어지는 부분에 있다. 허리에 두른 비단 띠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은 출세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람에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도 동시에 암시한다. 조용필 생가의 경우 주변이 과수원으로 개간되면서 더욱더 바람에 쉽게 노출되었다. 그만큼 흩어짐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런 터에선 재산도 사람도 흩어지게 마련이다.
1990년대 중반 이인제 의원이 경기도지사이던 시절 이곳 조용필 생가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땅값이 너무 비싸 포기하고 말았다. 이곳 생가터는 사람이 거주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터로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작고한 조용필의 부모 묘와 부인 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생가터를 복원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