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데이’가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최대의이벤트데이가 되면서 긴 모양의 과자는 초가을부터 사재기 현상을 빚는다.
전자가 주체적이지만 다소 둔감한 편이라면, 후자는 사교적이지만 행여 트렌드에 뒤질까 전전긍긍하는 편일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어느 편을 주장하든, 대세는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해놓은 기념일을 챙기는 쪽에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다이어리에 표시된 이벤트데이와 파티를 챙기는 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올 가을의 공식적인 이벤트데이만 해도 10월24일 사과의 날, 31일 홍대 앞과 강남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환하게 밝힌 할로윈데이와 테크노클럽에서 발원한 클럽데이, 또 11월11일은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최대의 축제일로 등극한 빼빼로데이고 11월14일은 무비데이(영화 보는 날), 11월19일은 보졸레누보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그 외 청담동과 홍대 앞에선 오늘도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리는 중이다.
‘명절증후군’이란 말을 만들어낼 만큼 의무적이고 전통적인 기념일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기념일을 만들어 스스로 즐기는 ‘이벤트족’과 ‘파티족’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이어리에 매일매일의 이벤트를 꼼꼼히 적어두고, 이름난 파티 플래너와 호스트들에게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걸 잊지 않는다.
발렌타인데이에서 빼빼로데이, 그리고 각종 파티들이 ‘마케팅’의 결과라는 것은 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순순히 인정한다. 경상도 한 여학교에서 과자 모양처럼 날씬해지라는 의미로 친구들에게 빼빼로를 선물한 데서 유래했다는 빼빼로데이는 제과업계의 지형을 바꿔놓을 만큼 큰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유치원에서는 빼빼로 게임을 하고 초·중·고생들은 친구들에게 팬시하게 포장한 빼빼로를 선물한다. 11월11일 11시 11분에 먹어야 한다는 ‘주문’ 때문에 수업 중 빼빼로를 먹는 아이들도 많다.
‘마케팅’의 승리 그러나 이젠 문화
와인 열풍이 불면서 대형 호텔과 와인 바, 클럽들은 일제히 개성 있는 ‘보졸레누보’ 이벤트를 기획한다.
“지방신문에 ‘빼빼로데이’에 대한 짧은 기사가 실린 걸 보고 저희도 깜짝 놀랐죠. ‘자생적’으로 시작된 이벤트를 전국적 행사로 끌어올린 건 마케팅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롯데제과 최경인 홍보팀장)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대부분이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등이 ‘어른들의 상술’에 의해 생긴 이벤트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말하면서도 그중 상당수는 ‘친구와의 우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따돌림 당할까봐’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대답했다. 특히 2학년생은 한 학급의 절반이 빼빼로데이를 기념한다고 대답했다.
대입수능일은 전 국민이 긴장하는 시험날이지만, 최고의 해방감이 기다리는 날이다. 각종 아이디어가 동원된 상품이 팔리는 것을 보면 가장 한국적인 이벤트데이이기도 하다.
여중생들은 그 외에 ‘오늘, 그날’로 다이어리데이(다이어리 선물), 발렌타인데이(초콜릿 선물), 화이트데이(사탕 선물), 블랙데이(검은색 옷 입고 자장면 먹기), 로즈데이(장미 선물), 키스데이, 링 혹은 실버데이(은반지 선물), 쿠키데이(쿠키 선물), 무비데이, 투투(이성친구 만난 지 22일째 되는 날로 친구들이 200원이나 2200원을 축하금으로 준다), 포포(이성친구 만난 지 44일째 되는 날 서로 불만을 털어놓는다) 등을 알고 있거나 이들 각종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담동과 홍대 앞에서 발원한 ‘파티족’들도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주한미군들 사이에서 시작된 할로윈데이 파티나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보졸레누보 파티는 외국의 전통적 풍습에서 유래했지만 이제 우리나라 특급호텔과 주요 클럽의 대목날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열리는 파티는 대부분 패션하우스의 런칭을 겸한다. 즉 패션하우스에서 파티 비용을 대고 패션 관계자들과 고객들이 참석하는 형식이다. 사진작가에서 최근엔 파티 디렉터로 많이 알려진 김용호씨는 “전에는 런칭쇼라면 새 상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상품 자체보다 상품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즉 파티의 분위기, 파티에 초청받은 손님들을 통해 상품을 홍보한다”고 말한다.
파티 관련 직종 ‘선망의 대상’
이처럼 매일 한두 군데서 런칭 파티가 열리다 보니 파티를 좀더 개성 있게 만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가 동원되며 대개 대형화(반대로 소수정예화), 고급화 경향을 띠게 된다. 모 명품브랜드가 마련한 단 한 번의 파티에 10억원이 들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 후 웬만한 브랜드의 런칭 파티에는 3억~4억원이 소요되고, 참석자만 1000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형식도 다양해져 테크노 DJ가 이끄는 일반적 파티에서 마임니스트, 마술사 등이 초청되는 파티까지 있고, 최근엔 태국의 알카자쇼가 우리나라 파티에 등장했다. 파티 자체가 산업화, 전문화되고 있는 것.
‘신문화 전문기업’을 표방하는 파티 캐리터링업체 ‘라 퀴진’의 경우 2000년 설립 이후 불경기 속에서도 매년 매출이 크게 상승하고 있으며 함께 운영하는 관련학과 강의에도 지원자가 몰려 3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또한 파티의 컨셉트를 짜고 인테리어, 메뉴, 디자인 등을 기획하는 파티플래너, 파티의 미술감독격인 파티디자이너, 꽃장식을 담당하는 플로리스트, 음식을 디자인하는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나 젊은층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벤트족이나 파티족은 ‘상업적’ 목적에서 시작한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이긴 하지만 이것이 광범위하고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시각을 요구한다. 자기들끼리 ‘그날’을 즐기는 여학생들이나 파티를 전전하는 파티족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그동안 직접 참여하는 놀이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네스카페를 홍보하는 신상현씨는 “우리나라에서 남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기회가 없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인맥도 넓히기 위해 파티에 간다”고 말한다.
파티플래너 1호로 유명해진 지미기씨는 “외국에 있다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주말에 별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파티였다”며 “돌잔치, 환갑잔치, 생일잔치에 가면 천편일률적인 형식에 모두 구경꾼인 데 비해 파티는 그 자체가 창조적이며 모두 참여하는 이벤트라 인기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각종 이벤트데이와 파티의 진정한 매력은 따로 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의미를 은밀히 즐기고 싶어하는 ‘배타성’이다.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은어’들로 각종 ‘데이’를 기념하는 아이들의 의식이 그러하고, 돈을 내는 파티조차 ‘크레디트’를 가진 파티족을 통해 연결해야 한다는 점이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낸다. 김용호씨는 “파티의 목적은 폐쇄성이다. 파티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즐거움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서울에 땐스홀을 허하라’의 저자이자 문화평론가인 김진송씨는 “어떤 요소가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여지려면 매우 이질적이고 낯선 매력이 있어야 한다. 자기들만의 이벤트나 파티는 이를 통해 세대와 계급적 차이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폐쇄적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벤트족’이나 ‘파티족’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선물을 주고받거나 특별한 공간에 모이는 행위뿐 아니라 ‘특별한 시간’이라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