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손회장은 한나라당에 100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데 대해 “이는 자의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김대중(DJ) 정권 4년 동안 민주당에는 140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반면 한나라당에는 8억원밖에 못 줬다. 이에 한나라당이 ‘최소한 60(여당)대 40(야당) 비율은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집권시 표적사정 가능성을 내비쳐 피할 방법이 없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통령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씨에게 제공한 11억원에 대해서는 “대선과 관계없다. 이영로씨가 이전부터 생명공학사업 연구개발 자금 지원을 요청했는데 노대통령이 집권하고 보니 역시 안 줄 수 없었다. 그게 최도술씨에게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손회장은 또 “결과적으로 개혁 주도권 싸움의 와중에 SK가 걸려들어 피해를 보게 됐다. 검찰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는데, 젊은 검사들의 변화를 읽지 못해 그들이 상층부를 공격할 수도 있음을 예상치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각각 2시간30분~3시간씩 진행된 강연에서 손회장은 시종일관 격앙된 음성으로 “잘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 임직원의 공격적인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했으며, 연수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에는 술잔을 돌리는 등 시종일관 흥분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SK 관계사 신임 팀장들을 상대로 강연 중인 손길승 SK그룹 회장.
손회장이 이처럼 보안이 완전 보장되지 않는 자리에서 다소 위험한 발언을 계속한 데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직원들의 사기 진작이 절실했기 때문이라거나 ‘한 배’를 탄 사람들에게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고 싶은 인간적 유혹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 쪽에 은근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최태원 회장에 대한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손회장은 먼저 SK그룹 경영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손회장은 자신이 차장 진급 심사에서 누락된 경험을 털어놓으며 “책임진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지 사표를 내는 것이 아니다. 사표는 무책임한 행위다. 또한 권한은 책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검찰 수사와 관련한 발언이 시작됐다. 손회장은 먼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고통받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손회장의 배경 설명이다.
배임 혐의로 구속된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 2월22일 밤 서울지검을 나서 구치소를 향하고 있다(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는 손길승 회장.
당시(1998년) 부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정부와 사회의 명령이었다. ‘아상’을 털어낼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5대 그룹에 전화를 걸어 ‘절대 부도를 내지 말라’는 별도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전쟁 중에 한 살인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인을 했으니 죄라고 하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현재 청산 절차를 밟고 있는 ‘아상’은 SK네트워크의 부실을 분산하기 위한 일종의 페이퍼 컴퍼니다. SK사태 초기 검찰 조사를 받은 임직원들은 ‘아상’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그러나 분식회계 문제가 커지자 결국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추가수익을 위한 선물투자’는 11월6일 검찰 발표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검찰은 이와 관련, 손회장을 개인 횡령 혐의로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손회장은 검찰 발표 훨씬 전 이 문제를 공개 거론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자금 제공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일까.
“정치자금은 합법적으로 다 줄 수가 없다. 현재 우리 그룹 계열사가 63개다. 이중 합법적으로 후원금을 낼 수 있는 데가 13개 정도다. 기업당 1년 한도는 2억원이다. (여기에 개인후원금 명목까지 보태) 여당 60%, 야당 40% 정도로 나눠주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DJ 정권 동안 민주당에 140억원, 한나라당에 8억원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쯤부터 한나라당이 자꾸 우리 그룹을 못살게 굴더라. 확인해보니 돈을 더 내라는 거였다. 대선 때 할당된 양이 그만큼이라고 100억원을 얘기했다. 집권할 경우 표적사정을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안 줄 수 있었겠나. 그래서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과 나, 둘이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고 처리했다. 민주당도 25억원을 요구하기에 다 줬다.
최도술씨 문제는 대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영로씨가 이전부터 사업자금 지원을 요청해왔는데 노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니 안 줄 수 없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최도술씨에게 가 이렇게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손회장은 또 “이 문제와 관련 SK해운 직원들은 아무 죄가 없다. 비상장회사라 억울하게 뒤집어쓴 것이다.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늘 내가 우리 그룹 창구였다. 선대 회장 때부터 그랬다. 대통령만 선대 회장이 만났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도 결국 내가 다 책임지지 않았나. 깨끗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청소를 맡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건도 최태원 회장께는 ‘내용만 알고 계시라, 방법은 알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아닌 최회장이 구속 수감된 것에 대해서는 “검찰이 국민정서법에 따라 오너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날까지 (최회장과) 서로 들어가겠다고 싸웠다. 최회장께서 ‘사회가 원하는 건 본인’이라며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러자 김창근 본부장이 ‘회장님 혼자 보낼 수 없다, 내가 공범’이라고 주장하며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SK그룹 회장으로 선임될 당시의 손길승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문제는 SK증권이 증자를 하면서 향후 주가가 오르지 않을 경우 SK증권이 주식을 되사거나 되팔기로 JP모건과 ‘옵션 이면계약’을 체결한 것. 실제로 SK측은 SK증권의 주가가 하락하자 이면계약에 따라 지난해 10월 그룹 계열사인 SK네트워크의 해외법인을 통해 JP모건이 보유중이던 SK증권 주식 2405만주를 주당 6070원씩, 총 1460억원에 사들였다.
손회장은 이에 대해 “검찰은 SK증권과 직접 거래관계가 없는 종합상사(SK네트워크)가 보증을 선 부분을 문제삼고 있다. SK네트워크 주주에 대한 배임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잘 마무리될 것이다. 1심에서는 유죄 판결이 났으나 2심이 진행 중인 지금 잘 소명돼가고 있다. 결국 (3심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워커힐과 SK C&C 간 주식 맞교환 건
1998년 선대 회장인 최종현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한 후 최태원 회장은 관계사 간 복잡한 출자관계 때문에 경영권 안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상장사인 SK C&C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걸림돌이 됐다. 모회사 격인 SK㈜에 대한 SK C&C의 의결권이 제한을 받게 된 것.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그룹은 SK C&C가 보유 중이던 SK㈜ 지분을 최회장에게 넘기는 작업을 추진했다. 최회장 소유이던 비상장사 ‘워커힐’의 지분 40.7%(325만6000주)와 SK C&C가 보유한 SK㈜ 지분 5.08%(646만3911주)를 맞교환(스와핑)한 것이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최회장이 ‘워커힐’ 주가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700억~800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며 최회장과 손회장 등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이 건 역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손회장은 “주식 맞교환은 경영권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를 검찰이 전형적인 재벌 2세 탈세 수법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는 우리 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계에서 경영권 안정을 위해 흔히 쓰는 기법이다. 세법을 근거로 추진한 거래인데 문제가 됐다. 하지만 이 역시 잘 소명되리라 본다. ‘채권단이’ 워커힐의 자산가치를 1조원 이상으로 평가한 것만으로도 문제 없는 거래임이 증명된 것 아니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손회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확신범’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종합상사의 부실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SK네트워크 부실의 뿌리는 1980~81년 오일 파동이다. 그때 우리 노력으로 울산항에 원유를 실은 배가 들어왔다. 이런 과정에서부터 부실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SK네트워크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업구조를 다각화했고, SK텔레콤(이하 SKT) 주식 공개매각에 참여해 자본금을 늘렸다. 당시 (SKT 주주인) 타이거펀드가 김대중 대통령까지 동원해 압력을 가했지만 증자 참여가 전체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 일임을 잘 설명해 해결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 작업도 진행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유력한 해결책은 NTT 도코모(이하 NTT)와의 딜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 일이 실패하면서 큰 구멍이 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NTT와의 ‘빅딜’이란 무엇을 뜻하나. SK네트워크가 가진 SKT 주식 10% 전체와 SK㈜가 가진 SKT 주식 30% 중 5%, 그러니까 양쪽을 합쳐 15%를 주당 50만5000원의 가격에 NTT에 매각해 약 5조원의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SK네트워크에 약 3조5000억원의 자금이 수혈될 것이었다.
손회장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 돈으로 부실을 메울 생각이었다. 그 때는 어떤 식으로 ‘고해성사’를 할까 고민할 만큼 전망이 밝았다. 그런데 정부가 IMT2000 사업에서 동기식을 강제하는 바람에 MOU(양해각서) 작성까지 갔던 거래가 깨지고 말았다.”
이 거래와 관련해 NTT가 내건 조건은 SKT가 IMT2000에서 비동기식 사업권을 따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압력에 따라 SKT에 동기식 사업권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정식 거래가 아닌 MOU 단계에서 진행을 멈춘 것. 이후 SKT는 비동기식 사업권 획득에 성공했으나 이미 거래는 물 건너간 다음이었다. MOU 작성에서 비동기식 사업자 결정 시점 사이에, NTT의 방침이 180도 달라지고 만 것이다.
검찰 수사와 관련한 현실 인식
손회장은 “결론적으로 개혁 주도권 싸움 와중에 SK가 크게 걸리고 말았다. 현대의 비자금 사건은 DJ가 막아줬는데 우리는 방패막이 없었다. 최근 2년간 (KT 민영화 이후) 우리 회사와 관련한 논란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분식회계 사건으로 발전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대로 갔을 경우 2005년이면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물론 우리 잘못이 크다. 돈을 벌수록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반성할 일”이라고도 했다.
아울러 손회장은 “지금껏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크게 당했다. 개혁 정권의 개혁 검찰에 당한 것이다. 지금껏 검찰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는데 386 검사들의 변화를 못 읽은 것이 큰 문제가 됐다. 상층 라인이 오히려 평검사들에게 당할 수도 있음을 예상치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파워 쉬프트를 읽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시민단체와 노조가 강해졌다는 발언도 했는데, SK㈜ 노조가 자신을 고발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식이 아비를 고소한 거나 마찬가지”라며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