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홍익회 사옥.
오랜 독점은 구린내를 풍기게 마련이다. 홍익회가 바로 그렇다. 1936년 일제가 세운 철도강생회가 그 모체인 홍익회엔 ‘재단법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수익금의 대부분을 ‘목적사업’에 사용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이다. ‘재단법인’이라는 이 네 글자는 70년 가까이 홍익회가 전국의 철도역사를 마음대로 사용해온 근거였다. 홍익회의 수익금은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의 유가족, 근무중 부상한 공상자(公傷者),생계가 곤궁한 장기근속 퇴직자 등에게 돌아간다. 홍익회의 복지사업과 원호사업을 훑어보면 ‘비싼 돈을 주고 물건을 사도 아깝지 않을 만큼’ 뜻 있는 사업이 많은 게 사실이다.
철도청 땅에서 ‘봉이 김선달’식 사업
그러나 홍익회 매점의 ‘운영권’이 철도공상자 대신 일반인에게 ‘은밀하게’ 넘겨지고, 그 과정에서 공상자에게 돌아갈 원호금이 콸콸 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이니 아깝지 않다’는 생각은 이내 사라진다. 홍익회가 운영하는 매점들은 ‘원칙적으로’ 철도공상자가 ‘운영’하게 되어 있다. 철도공상자는 홍익회의 판매직원 자격으로 물건을 팔고 판매량에 따라 급여 형식으로 성과급을 받아간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대리인’이라고 불리는 매점 운영자의 십중팔구는 철도공상자가 아닌 ‘일반인’이다.
일반매장과 달리 공상자가 아니더라도 운영할 수 있는 특수매장(책, 꽃, 화장품, 빵, 아이스크림 등 기획상품을 파는 매장)의 경우엔 누구나 홍익회와 손잡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 국가 땅을 점유해 수입을 올리는, ‘봉이 김선달’식 사업을 벌일 수 있다. 홍익회가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특정회사’가 기획매장을 운영할 수 있는데, 홍익회의 간택을 받은 특정회사는 크게 돈 들이지 않고 매장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을 모아 돈을 챙긴다. 홍익회의 눈길을 사로잡으면 철도청의 땅에서 홍익회의 도움을 받아 손쉽게 ‘프랜차이즈 사업’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엔 철도청 전 직원이 세운 회사가 이런 방식으로 30여개 매장을 알선해 손쉽게 돈을 벌려다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문제는 일반인들이 홍익회 매점을 더 많이 운영하면 할수록 철도공상자들에게 돌아갈 원호금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매점에서 대리인 역할을 하는 철도공상자들에겐 원호금 지급이 중단되고 성과급이 원호금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월 50만원의 원호금을 받는 사람이 성과급을 200만원 받는 매장을 운영하게 되면 원호금을 받을 때보다 150만원의 수익을 더 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200만원짜리 매장이 일반인에게 넘어가면 철도공상자들에게 돌아갈 돈 200만원이 고스란히 낭비되는 것이다.
매출이 쏠쏠한 홍익회 매점의 대리인이 되면 누구나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 홍익회가 납품까지 책임지고 있는 터라 목만 좋으면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것. 목에 따라 월 매출액이 크게 차이가 나지만 월 300만원 이상의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매점도 적지 않다. 홍익회 매점 대리인 J씨는 “현 철도공상회 회장도 한때는 신문·잡지·잡화 매점의 대리인이었는데 지금은 잘 살고 있다”면서 “알짜 매점의 수익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귀띔했다.
‘합법적으로 매매할 수 없는 물건이므로 명의 변경과 동시에 계약서를 파기한다’는 단서가 붙은 홍익회 매점 매매계약서. 홍익회 매점은 원칙적으로 매매할 수 없다.
철도공상자들이 포기한 매점은 결국 일반인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일반인이 매점 대리인으로 선정되는 과정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철도공상자가 포기한 매점은 홍익회 지역본부 게시판과 홍익회 인터넷홈페이지에 이틀간 공고된다(홍익회측은 공고기간을 10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짧은 기간의 게시판, 홈페이지 공고를 통해 ‘매점이 나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인지하기는 어렵다. 홍익회 매점을 수천만원을 받고 전매한 경험이 있는 K씨는 “홍익회 매점은 ‘백’이 있거나 다른 수단을 써야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다른 할 일이 생기면 매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목돈을 마련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경쟁체제, 투명한 원호금 마련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위 ‘목 좋은’ 매점의 상당수는 홍익회 전 직원과 홍익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관계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역에 주로 포진한 홍익회 출신들과 홍익회에 특정상품을 독점으로 납품하고 있는 김모씨 일가가 대표적인 경우. 원칙적으로는 공상자에게 돌아가야 할 매점에서 홍익회 전 직원들과 관계자들이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납품업체 대표인 김씨 일가는 그동안 홍익회의 ‘알짜 매점’ 5곳을 운영해왔다. 김씨의 형수 2명과 조카, 처조카, 처조카사위가 수익이 짭짤한 신도림역 구로역 등의 홍익회 매점 대리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 김씨 일가가 지난해 홍익회에서 받아간 돈은 최소한 2억원이 넘는다. 이는 홍익회가 공상퇴직자(1187명)와 순직자 유가족(1178명)에게 연간 지급하는 원호금 120여억원의 2%에 가까운 금액이다.
홍익회 대리인들 사이에 오가는 은어 중에 ‘양산도’라는 게 있다. 공산품의 홍익회 판매가가 시중가보다 높은 것을 악용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홍익회가 납품한 물건과 똑같은 물건을 시중에서 들여와 대신 판매하는 것이다. 이렇게 팔린 물품 값은 홍익회의 수익에 잡히지 않으며 원호금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양산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홍익회의 독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도권 전철역사 내 홍익회 매점.
철도 소비자들은 언제까지 홍익회의 맛없는 김밥을 먹어야 할까. 철도청은 현재 공사로의 전환을 추진중이다. 공사로 ‘신분’이 바뀌면 다양한 수익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원호금 충당을 이유로 굳이 홍익회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철도노조의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원호금을 끌어안지 않은 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됐다”면서 “철도공사로 전환되면 경쟁체제를 도입해 투명하게 원호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철도청 관계자는 “공사 전환시 홍익회를 아예 없애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방안이 거론되고는 있지만 홍익회 쪽 반발이 심해 구체화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철도청이 철도 소비자들을 선택할지, 아니면 홍익회를 위한 결정을 내릴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