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황우석 생가.
황우석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황 교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풍수 호사가들이 황 교수의 생가와 선영을 잇따라 방문했다. 방문객이 늘어나자 생가와 선영 근처에까지 포장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관광버스를 대절해 황 교수 생가와 선영을 찾은 이들 대부분은 “이곳이 대명당임을 확인했다”고 입을 모았다. 상황이 반전돼 지난해 말 논문조작 사건이 알려진 뒤에도 수는 줄었지만 생가와 선영을 찾는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단지 그들의 반응이 달라졌을 뿐이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흉지임을 확인하고 간다”고 말한다. 또 이전에 다녀간 이들도 “그것 봐라, 내가 흉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가볍고 가벼운 것이 풍수라며 마을의 어느 분이 혀를 찬다(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현재 마을 어귀에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는 분의 증언).
황 교수 조부 묘 자리는 주변 산들이 잘 감싸고 맥도 제대로 받은 곳
나는 ‘황 교수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언론과 누리꾼, 그리고 학자들의 의견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2월5일 일요일, 부여군 은산면 홍산2리를 찾았다. 천박하다는 조소를 무릅쓰고 다른 풍수 호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생가와 선영을 보면 황 교수의 진실이나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마을 사람들에게 생가와 선영의 위치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랜 답사 경험 덕분에 생가와 선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 말고도 10여명의 풍수 호사가가 승합차를 이용해 마을을 찾아왔다.
풍수에서 길흉화복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가와 선영은 어떤 비중으로 살펴야 할까? 풍수의 고전 ‘황제택경(黃帝宅經)’에는 집과 무덤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묘지가 흉하고 집터가 좋으면 자손이 벼슬을 하고, 묘는 좋은데 집터가 흉하면 먹고사는 것이 부족하다.”
또 여러 조상 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좋은 자리도 있을 것이고 나쁜 자리도 있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조선시대 풍수지리학 고시과목 ‘호순신(胡舜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집집마다 고조(高祖), 증조(曾祖) 이하 여러 무덤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 무덤의 좋고 나쁨이 상반될 것이다. 그 가운데 좋은 무덤을 본 사람은 그 집안이 길(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쁜 무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여러 무덤을 가지고서 총괄하여 판단해야 한다. …촌수가 멀면 길흉화복이 완만하게 나타나며, 가깝고 친하면 길흉화복이 빠르게 나타난다.”
이런 풍수 원칙에 따라 황 교수의 생가와 아버지 묘, 할머니 묘, 할아버지 묘를 살펴본다면 어떻게 길흉화복을 말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훨씬 많았다. 엄밀하게 풍수설을 따라서 잡은 것은 아니나 할아버지 묘는 드물게 좋은 자리였다. 맥을 제대로 받았고, 주변의 산들이 잘 감싸고 있었다. 물길이 빠져나가는 수구는 조여 있었고, 흙색 또한 밝아서 좋았다. 새롭게 단장된 생가 역시 마을 뒷산에서 뻗어 내려온 중심 맥 위에 자리했으며, 청룡백호가 비교적 잘 감싸주고 있었다. 또 황 교수의 할머니 묘에서 바라본 앞산(朝山)은 붓과 같은 필봉(筆峯)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황 교수가 ‘학문의 사기꾼’이 되거나 불운을 당할 땅은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혼자 마을을 돌고 있으니, 마을 어른 한 분(황동주·71)이 경계심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뭐 하느냐고 묻는다. 답사 목적과 신분을 밝히자, “이미 우석(황 교수)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진데, 또 뭣 때문에!” 하고 화를 내신다. “진실이 밝혀지면, 나중에 모두 잘 되겠지요”라고 위로의 말을 하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