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출 중인 리안.
가족 간 갈등과 사랑 그린 작품 많아
리안은 1954년 10월23일, 대만의 핑둥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하는 좌절을 겪었다. 1978년 미국으로 건너간 리안은 일리노이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뉴욕대학에서 영화 연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분계선’ 등의 단편영화로 뉴욕대학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지만 졸업 후에는 특정한 직업 없이 6년을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 대만 영화사가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두 편의 시나리오 ‘쿵후선생’과 ‘결혼피로연’이 모두 당선되면서, 이 두 시나리오를 포함해 3편의 영화 제작을 후원받을 수 있게 됐다. 1992년 리안은 자신의 시나리오로 데뷔작 ‘쿵후선생’을 만들었다. 미국 여자와 결혼해 뉴욕에 살고 있는 아들, 아들과 살려고 대만에서 건너온 쿵후 선생 아버지. 영화는 이들 사이의 세대 갈등과 문화 차이를 따뜻하고 섬세한 시각으로 그려냈고,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작품상 수상 등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리안이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93년 ‘결혼피로연’이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으면서부터다. 뉴욕에서 살고 있는 게이인 아들, 아무것도 모른 채 손자를 기다리는 대만의 부모, 아들의 미국인 남자 애인, 영주권을 갖기 위해 아들과 위장결혼을 하는 중국 본토 여자. 부모를 안심시키려고 계획된 아들의 위장결혼은 그러나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꼬여만 간다. 중국 여자는 임신을 하고, 남자 애인은 질투에 빠지고, 아버지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은 결코 화해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겁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러기는커녕 밝고 코믹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리안은 상처받은 이들 모두에게 가슴 뭉클하고 따뜻한 화해를 선사한다. 각자는 원했던 것을 갖게 된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는 손자를 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를 리안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그려냈고, 그 결과 ‘결혼피로연’은 동성애에 대해 보수적인 대만에서 20년 만의 최대 흥행작이 됐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면서 유럽과 북미지역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 것이다.
3월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 그가 연출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005), ‘와호장룡’(2000),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왼쪽부터).
이것은 동시에 리안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용서와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에 떨어지고 영화에 입문하면서 교육자였던 아버지를 계속 실망시켰다. 유학에서 돌아와 강단에 서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기대마저 저버렸다. 영화 속의 자식들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이제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됐다. 동양인에게 불효를 저지른 아들이라는 건 얼마나 무거운 업인가!
오랜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한 아버지를 떠나보낸 리안은 자신 또한 동양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 세계로 향한다. 리안의 영화를 관심 깊게 보았던 엠마 톰슨이 자신이 각색하고 주연할,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연출을 맡긴 것. 대만 출신 감독이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리안은 또다시 성공을 거머쥐었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과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를 통해 리안은 동양인이라는 한계를 벗고 할리우드의 관심을 끌게 된다. 뒤이어 연출한 두 편의 영화, 1970년대 미국 중산층 가족의 위기를 다룬 ‘아이스 스톰’(1997년)과 남북전쟁 시기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을 그린 ‘라이드 위드 데블’(1999년)은 미국의 역사와 사회에 내재한 문제를 정교한 연출력으로 예리하게 파헤쳐냈다.
좌절 위기에서 부친 유언 따라 재기 다져
그러나 미국 영화언론은 대만인이 미국의 치부를 드러낸다고 불편해했다. 데뷔 이후 처음 실패를 맛본 리안은 위기감 속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중국 무술의 진품 액션을 통해 ‘매트릭스’의 액션이 짝퉁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다짐으로 연출한 무협영화 ‘와호장룡’. 주윤발, 양자경, 장쯔이, 장진을 주연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우아한 무술동작과 오리엔탈리즘으로 친친 감은 이야기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아카데미 작품·감독·외국어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결국 기술 부문의 상을 받았다. 미국에서 영어 자막을 달고 흥행에 성공한, 대단히 이례적인 기록 또한 세웠다.
‘와호장룡’의 성공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여름 블록버스터 ‘헐크’를 연출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헐크’는 기이한 컬트영화가 됐고, 흥행에서 참패했다. 미국 펄프 코믹을 가족이라는 테마로 재해석하려던 리안의 야심은 맹렬한 비난 속에 무너져버렸다. 그는 여기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좌절 속에서 다가온 프로젝트가 바로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그러나 리안은 계속 망설였다. 은퇴까지 생각하는 그를 격려한 이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감독으로서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뜨기 직전, 아들에게 ‘영화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마음을 비우고 새 출발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16개의 영화상을 연속적으로 수상했다. 기적처럼 슬럼프에서 빠져나온 그는 아카데미상 시상 무대에 올라 “고인이 된 아버지께 ‘브로크백 마운틴’을 바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대만인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은 리안의 경력을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리안 영화의 두 장면.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에서 용은 바닥 모를 계곡으로 몸을 던지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거친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그리고 이제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는 “맹세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리안의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