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꽃가지를 흔들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전송하는 여고생들(왼쪽)과 출격 직전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가미카제 박물관 경내에는 한 어머니의 동상이 오도카니 서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제로센(零戰)의 잔해와 함께 낡은 그랜드피아노가 눈에 띈다. 음대 재학 중에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뽑힌 어느 학도병이 입영 전야에 그 피아노로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학생은 기체 결함으로 불시착을 하는 바람에 살아남았는데, 이것이 부끄러워 평생 본명을 감추고 살았다고 한다.
벽에는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스물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의 젊은이들. 그중에는 황당하게도 조선인도 끼여 있었다. 이들은 가련한 희생양일까, 아니면 숭고한 영웅일까? 박물관은 이 물음에는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그만큼 모호한 것은 방문자들이 남긴 메시지. 모두들 한목소리로 ‘평화’를 기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가해자였는가, 피해자였는가? 평화의 염원은 이 본질적 물음도 슬쩍 묻어버린다.
사쿠라가 지다
그들은 희생양인가, 아니면 영웅인가? 전쟁은 나의 가해인가, 아니면 내가 입은 피해인가? 이런 윤리적 물음에 명확한 답이 없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윤리적 문제 제기 대신에 존재하는 것은, 조국을 위해 제 몸을 내던져 봄날 흩날리는 벚꽃처럼 스러지는 장엄한 장면의 미적 감동뿐이다. 이렇게 윤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문제의 미학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일본 문화의 본질인 모양이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는 사쿠라를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견해다. 오오누키 에미코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는 가미카제 현상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쿠라 꽃의 의미가 일본의 현대에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천황을 위한 희생으로서 젊은 병사가 사쿠라처럼 진다’는 의미로 고정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미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국화로 상징되는 ‘미학성’과 칼이 대변하는 ‘잔인성’의 모순적 결합을 일본 문화의 특징으로 제시한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사쿠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미의식을 매개로 하여 작동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미의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람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는 데에 이 책의 두 번째 목적을 둔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묘사한 일본 만화.
이렇게 보면 사쿠라 꽃에는 원래 삶과 죽음의 모티브가 공존했던 셈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사쿠라’라는 낱말의 특징이었다. 이렇게 의미장이 불분명한 결과 “군부가 사쿠라 꽃에 의한 상징적 표상의 균형을 변화시켜 삶을 대신해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가능”했고, 일본인들은 메이지 이후에 사쿠라의 표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초기만 해도 사쿠라는 살아 있는 일본인의 미덕을 가리키는 밝은 이미지로 사용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심어진 사쿠라도 원래 죽은 병사들의 아름다운 혼을 살아 있는 꽃에 비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야스쿠니 경내의 사쿠라 꽃이 천황=국가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된 것은 ‘육탄3용사’ 등 군국주의 미담이 성행하던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사쿠라의 지배적 표상은 활짝 ‘피는 사쿠라’에서 흐드러지게 ‘지는 사쿠라’로 변화한다.
죽음의 유미화
1800년대 모시던 스님을 따라 바다에 뛰어드는 사무라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연상케 한다.
1970년대에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스스로 배를 가름으로써 마지막 사무라이와 함께 사라졌던 화려한 죽음의 미학을 부활시키려 했다. 자신이 언젠가 연극으로 연출했던 그 장면을 현실로 실현한 것이다. 그가 생전에 연출해서 찍은 두 장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다. 칼을 든 사무라이의 사디즘의 요소와 순교하는 세바스찬의 마조히즘. 서로 상반되는 듯한 이 두 장의 사진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유미화다. 가미카제 대원들도 미시마처럼 죽음의 탐미주의에 빠져 있었던 걸까?
미시마 유키오가 연출한 화살을 맞고 순교하는 세바스찬(위)과 칼을 든 사무라이 모습. 상반된 듯한 두 사진의 공통점은 죽음의 유미화다.
메코네상스
가미카제 비행사들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천황의 신격을 부정하는 기독교 신자도 있었고 심지어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까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는 믿음이 어떻게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관념과 공존할 수 있었을까? 사사키라는 병사의 글을 보자. “구 자본주의 체제의 힘이 패전으로 짓눌려버린다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불사조와 같이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 우리는 지금 그것을 원한다.”
한마디로 자신은 승리가 아니라 패전을 위해서, 그리고 적을 멸하는 게 아니라 외려 자신과 일본을 멸하기 위해 자살공격을 한다는 얘기다. 물론 그 후에 찾아올 패전이 구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려 해방된 새로운 일본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누가 봐도 이상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그들은 국가가 제시한 허구적 이념을, 자신이 갖고 있던 (대부분 서구의 사상에서 받아들인) 이상과 동일시하는 ‘메코네상스(=오인)’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저자는 “이 메코네상스의 과정에서 사쿠라 꽃의 미적 가치가 갖는 연상효과”가 동원됐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정부가 강요하는 군국주의 이념이 사쿠라 꽃의 순결한 이미지를 통해 개인이 가진 순수한 이상주의와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정부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그들이 직시할 수 없었던 과정에는 사쿠라에 의한 미화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실존주의
“직시할 수 없었던”이라는 표현은 이 오류가 마치 인식론적 오류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메코네상스’라는 프랑스어 단어 역시 ‘인식’에 관련된 오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단지 인식의 오류에 불과했을까? 가미카제의 병사들이라고 “자신의 생각과 정부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직시”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미카제의 병사들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사실상 강요된 것이었다. 패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더군다나 학도병으로 징집된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피할 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강요된 죽음이라도 최소한 의미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메코네상스’라 부른 오류는 어쩌면 어차피 당할 죽음에 의미라도 부여하려는 실존적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꿈과 이상에 넘치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본 제국주의의 극악무도한 행위를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조국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벚꽃은 다시 한 번 흐드러지게 지고 싶은 모양이다. 구리로 만든 어머니는 박물관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아직도 이렇게 노래하는 듯하다.
“1억 일본인은 구하는 것은 이 길이라고/ 어머니도 내버려두고 내 아들은 싸우러 갔나니/ 우는 것은 내 아들의 뜻에 거스르는 것임을 생각하면서/ 울지 않는 것은 더욱 씁쓸한 일임을/ 내 남편과 아들이 기다리는 천국에 기뻐하며/ 용기 있게 나아가는 이 내 몸이여/ 아아, 내 아들아 편안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