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금융기관의 주가지수연계증권 판매 창구에서 고객이 상담을 하고 있다.
특히 이른바 ‘부티크’로 불리는 사설 투자자문 전문 트레이더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부티크에서 일했던 한 트레이더는 이렇게 회고한다.
“단두대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장이 열리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게 뻔했다. 그런데 아무 해결책이 없었다. 그냥 앉아서 죽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 이날 증시가 개장하면서 코스피 지수는 12.02%나 폭락했다. 주식 투자가 대부분이 큰 손해를 봤다. 그렇다면 12.02%의 손실이 ‘단두대’의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였을까. 그 정도의 손실이라면 얼마든지 재기를 노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부티크 트레이더들은 일반 주식투자보다 주가지수 선물과 옵션 투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옵션 투자에서는 옵션을 매도하는 전략을 자주 사용했다.
옵션을 매도하는 것은 이길 확률이 매우 높은 투자 전략이지만 한번 깨지면 무한대의 손실을 책임져야 하는 위험한 투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하필 9월12일은 옵션 만기일 하루 전날이었다. 만기일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터지고 나니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
최근 인기 주식워런트증권도 옵션
실제 장이 열리자 풋옵션 시장에서 충격적인 모습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것은 테러만 아니었으면 하루 뒤 휴지조각이 됐을 행사가격 62.5짜리 풋옵션 가격이 이날 무려 507배나 급등한 것이다. 이 풋옵션을 매수한 사람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풋옵션 매도 포지션에 있었던 수십 명의 트레이더들은 전 재산을 날리고 여의도를 쓸쓸히 떠났다.
한국은 파생상품 시장의 천국이다. 주가지수 옵션시장의 거래량은 세계 1위를 자랑한다. 주가지수 선물시장 거래량도 당당히 세계 5위다. 개인 투자자들이 선물과 옵션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가지수 선물과 옵션은 그 원리와 가격 형성 과정을 개인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실전에서도 기관 투자가들의 다양한 거래 기법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변수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개인 투자자들이 이 어려운 시장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 한 가지, 하루 가격 제한폭이 15%에 묶여 있는 증시에 비해 선물과 옵션은 가격 변동폭이 무궁무진한 ‘짜릿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물과 옵션 시장을 ‘국가 공인 도박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개별 종목을 기초 자산으로 하는 주식워런트증권(ELW)이라는 상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개발된 이 상품도 구조는 복잡해 보이지만 본질은 여러 가지 옵션을 이용해 꾸민 파생상품이다. 궁극적으로는 옵션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또 2004년 출시돼 지난해 큰 인기를 모았던 주가지수연계증권(ELS)도 마찬가지. 원금의 90% 이상을 채권에 투자해 안정성을 높이긴 했지만 원금의 10%가량은 위험이 높은 파생상품에 투자한다.
이런 상품은 9·11 테러 직전 트레이더들이 그랬던 것처럼 승률이 상당히 높다. 대부분은 목표 수익률을 얻거나 최소한 원금은 건진다. 문제는 한번 잘못 깨지면 시쳇말로 박살이 나는 수가 있다는 점이다.
2004년 판매된 ELS 가운데 원금의 70%가 깨진 상품도 있다.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결과다. 왜냐하면 ELS는 원금의 약 90%를 안전한 채권에 넣고 10%만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상품이기 때문. 투자한 돈 10%가 손실을 키워 전체 원금의 70%나 잡아먹은 셈이다.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과 증권사 직원들이 고객에게 이런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다행히 올해 금융감독원이 규정을 고쳐 은행과 증권사가 ELS를 팔 때 고객에게 위험을 반드시 고지하도록 했기 때문에 사정이 나아졌다.
선물이나 옵션 등 파생상품은 근본적으로 주식투자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실제 위험 회피(헤지) 수단으로 사용된다. 당연히 개인 투자자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옵션이나 선물에 직접 투자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선진국에선 직접투자 거의 없어
그러나 한국은 상황이 정반대다. 이런 기형적 현상은 증권사들이 부추긴 면이 없지 않다. 거래수수료가 주요 수입원인 증권사들은 파생상품 투자자를 특히 반긴다. 개인 투자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샀다 팔았다를 반복하는 ‘데이 트레이딩’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수료 수입도 많아진다. 이 때문에 5억원 정도 들고 영업점에 찾아가 선물 투자를 하겠다고 하면, 사무실도 내주고 컴퓨터도 제공하고 비서도 붙여주면서 거래를 부추기는 지방 영업점이 지금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개인 투자자들 가운데 선물이 무엇이고 옵션이 무엇인지 개념을 아는 투자자는 많지 않다. 다만 이들은 선물과 옵션의 화려한 변동성에 열광할 뿐이다. 선물은 변동성이 증시의 7~8배가량 된다. 옵션은 더 심하다.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대박을 꿈꾸며 파생상품 시장에 뛰어든다. 하지만 개인 투자자의 이런 소망이 실제 이뤄진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 투자자로 시작해 성공한 뒤 지금도 주가지수 선물시장의 최고수로 평가받는 신아투자자문 최정현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증시가 두발 자전거라면 파생상품 시장은 외발 자전거와 같다. 두발 자전거야 누구나 탈 수 있지만 외발 자전거는 잘 훈련된 사람만 탈 수 있다. 파생상품 시장에서 훈련이 덜 된 투자자가 성공한 전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 사장의 말도 사실 100% 옳은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훈련을 잘 받은 고수들조차 이 시장에서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96년 시장이 열린 이래 목포 세발낙지, 광주은행 피스톨 박, 불광동 고수, 동원증권 할아버지, 일산 가물치, 홍콩 물고기, 스트롱거 등 시장을 풍미했던 수많은 고수들이 등장했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 사장의 스승이자 ‘압구정동 미꾸라지’로 알려진 KR선물 윤강로 대표와 최 사장 두 사람 정도만이 성공한 투자자로 꼽힐 뿐이다.
최 사장은 “투자가 있는 곳에 어느 정도 투기가 따르는 것은 불가피하다”면서도 “한국 파생상품 시장에는 너무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돈을 굴리고 있는 게 문제”라고 강조했다. 개인 투자자의 피해를 줄이고, 파생상품 시장이 주식투자의 위험을 줄이는 본연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대박을 노리는 투기 문화부터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