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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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작가들 유쾌한 상상력

70년대 후반 태어난 외동딸·외아들 세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 작품에 그대로 담아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3-15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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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놀기’ 작가들 유쾌한 상상력

    ① 우혜민, ‘스머프’, 지퍼와 거울. ② 함진, pkm 갤러리 전시작, 부분. ③ 신창용, ‘드라이빙’, 아크릴.

    “전 ‘약속’이 싫어요. 여럿이 의논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끊임없이 남을 배려해야 하고,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기도 하니까요. 혼자 노는 것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아요.”

    서울 인사동 쌈지길 갤러리 숨에서 ‘혼자놀기’전(4월30일까지)을 열고 있는 이승연(28) 씨는 ‘혼자 늘어져 있을 때’ 주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럴 때는 “시체놀이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녀의 그림은 채색 드로잉으로 혼자 놀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이나 커피포트, 의자, 방구석처럼 ‘방바닥 눈높이’에서 이뤄진다.

    3월29일 인사동 갤러리 도스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우혜민(28) 씨 역시 혼자놀기를 작품으로 끌어낸 젊은 작가다.

    “5년 동안 미국 유학을 하면서 혼자놀기를 배웠어요. 밖에 나가면 영어를 써야 하니까 인형들에게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가르치며 놀았고, 작품 방향도 재료를 밖에 들고 다니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결정했죠.”

    원만한 대인관계보다 나만의 개성 중시



    우 씨 작품의 주제는 ‘혼자’의 단위인 ‘유니트(unit)’다. 1월 세오 갤러리에서 전시해 주목받은 ‘스머프’들은 지퍼를 1인치 단위로 자른 뒤 조합해 만든 것. 지퍼 조각들을 들고 다니며 머릿속에 형상화한 스머프들을 ‘눈이 빠지게’ 조합하는 것이 그녀의 ‘혼자놀기’다. 약간의 ‘강박증’을 인정하는 그녀는 “자 없이 지퍼를 잘라도 1인치로 딱 맞춰진다”고 말한다.

    ‘스노우캣’(인터넷 작가 권윤주 씨 작품의 주인공)과 ‘귀차니즘’으로 대표되는 ‘혼자놀기’가 20대의 일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되면서, 이를 작품으로 생산하는 작가들이 미술계에서도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혼자놀기’ 세대는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최초의 ‘외동딸’ ‘외아들’ 세대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도 많다. 이들은 형제자매 대신 TV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최초의 ‘네트’족이 됐으며, 현재는 디지털 카메라와 MP3의 주요 소비자다.

    뭐든 ‘함께’ 했기 때문에 남과 다른 것에 불안을 느끼는 386세대와 달리 이들은 남다른 ‘개성’에 목숨을 건다. 이들은 직장에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기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아가 직장에 인생을 거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고 있다. 2006년 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유사한 조사가 이뤄진 후 가장 많은 수인 159만5000명이 ‘취업할 생각이나 계획 없이 쉬었다’고 답했다. 이들이 바로 혼자놀기 세대다.

    ‘혼자놀기’ 작가들 유쾌한 상상력

    이승연, ‘혼자놀기’.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참여한 함진(28) 씨는 혼자놀기 세대 중 가장 먼저 유명해진 작가로 그 전형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부모가 맞벌이를 해 어린 시절부터 혼자 놀아야 했던 함 작가는 찰흙, 성냥개비, 종이 쪼가리, 벌레 등 온갖 것들을 조물락거려 뭔가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그대로 미술작품이 됐다. 내용이 ‘성인물’로 바뀌었을 뿐. 돋보기를 봐야 겨우 보이는 그의 ‘마이크로’한 세계 속에서 1cm가 안 되는 사람들이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한다. 아직도 개미와 파리가 잡혀와 작품에 등장한다.

    2005년 9월 ‘절대무적’ 전을 연 신창용(28) 씨를 보자. 그는 괴력의 ‘초인’에 집착하는데, 특히 이소룡을 많이 그려 ‘이소룡 작가’로 불린다. 어려서 남들보다 작은 키와 체력 때문에 고민한 작가는 ‘힘’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소룡의 절권도를 독파해가며 무술을 배웠다. 지금도 그는 ‘맘에 맞는 선생이 없어’ 혼자 무술하고 혼자 작업한다. “불끈불끈 보신탕 같은 작품을 그리는 것”이 그의 목표다.

    “윈도 세대와 달리 우리는 ‘도스’ 세대예요. 컴퓨터에 일일이 명령어를 쳤기 때문에 클릭만 하는 윈도 세대보다 기계를 이해하고, 더 친하고, 운영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생활도 프로그래밍해서 ‘혼자’ 놀죠. 예를 들면 친구 집까지 가는 길에 슈퍼, 구멍가게, 우체통이 있으면 그곳에서 각각 ‘파워’가 1000, 100, 10씩 늘어난다고 설정해놓고 장풍을 날리며 뛰어가 친구 집 문을 열어요. 그리고 양쪽에 잠복한 적을 먼저 공격하는 식이죠.”

    인터넷 포털 지식란에 ‘혼자놀기’ 방법으로 등재될 만한 말이다. ‘목적 없이 재미있자’가 삶의 목표라는 그는 비슷한 또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 8인과 ‘매뉴얼타입’이란 그룹을 만들고 있다.

    ‘혼자놀기’ 작가들 유쾌한 상상력

    김인배, ‘지리디슨 밤비니’, 플라스틱과 연필. 김인배의 캐리커처 자화상(상자 안).

    혼자 놀면서도 고독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 ‘혼자놀기’ 세대의 정서적 특징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혼자가 아니야’, ‘괜찮은 명훈이’ 등 ‘혼자놀기’ 소재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20대 이하의 시청자들은 배를 잡지만, 40대 이상 층에서는 이를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형상이나 오브제 만들며 즐거움 느껴”

    쌈지스페이스의 신현진 큐레이터는 “혼자놀기 세대 작가는 형상이나 오브제를 꼼지락거려 만들어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편집증적인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예술가에게 창작 행위는 ‘혼자놀기’다. 심지어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과 혼자놀기 세대의 작품은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70년대 작가들은 고립에 대해 매우 괴로워했고, 이를 작품 속에서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그들은 실생활에선 매우 사교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중 일부는 민중미술로 사회와 연대했고, 상당수는 ‘제도권 미술’로 편입됐다. 하지현 박사(정신과 전문의)는 “고립된 것으로 알려진 ‘괴짜’ 예술가 중 알고 보면 일부러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20대의 ‘혼자놀기’ 작가들은 고립됐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그것을 즐긴다. 이들의 작품은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서, 일체의 사회적 메시지를 읽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김인배(29) 씨의 작업은 ‘혼자놀기’ 작가들이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고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지난해 9월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열’ 전에서 코끼리 뒤통수 같은 형상을 드로잉한 뒤 석고로 뜨고, 흰색 석고 위에 다시 연필 스케치를 한 작품을 전시했다. 1차원 그림을

    3차원 입체로 만든 뒤, 다시 1차원 그림처럼 만든 것이다. 작가는 “평면과 입체의 구분이 엇나가게 될 때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현실에선 반대로 그는 ‘선’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보도블록의 선도 밟지 못한다. 어린 시절 실내화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면 자기 몸이 구르는 것처럼 괴로웠다고 한다.

    “늘 혼자 그림을 그리며 놀았어요. 똑똑해 보이도록 말하질 못해서 말을 거의 안 하고 그림을 그려 내밀고 ‘웃기지?’라고 묻곤 했었어요.”

    번지르르한 말, 논리적인 이성, 합리적인 질서로 이뤄진 사회에서 어긋나는 것, 그것이 ‘혼자놀기’의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진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서를 체득한 세대다.

    김인배 작가는 “난 세상의 ‘관절’ 같은 존재다. 나는 세상에 많은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므로 꼭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정치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지만,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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