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전단지를 돌리고자 부평의 큰 자동차 공장 정문 앞에 서 있었던 일이 있다. 출근길이었다.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건너편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성큼성큼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유인물을 돌려야 하는 의무를 잠시 잊은 채, 짙은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건너오는 거대한 군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행렬 앞에 건네는 유인물은 그야말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이십 년 전 그때의 감정은 일상의 엄숙함에 떠밀릴 수밖에 없는 한낱 문생의 초라한 감상일 뿐이었다.
흡사 트라우마처럼, 그때의 기억 때문에 언제나 인천은 잿빛으로 남아 있다. 이는 인천에서 나날의 삶을 운영하시는 분들에게 지극히 죄송스런 표현일 뿐만 아니라, 내 다른 기억과도 마찰을 빚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즉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찬란한 밤하늘 아래에서 관전하였고 SK와이번스의 빛나는 경기 또한 주말의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보았다.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북적 … ‘연경’ 2층에선 거리 한눈에 들어와

그리고 중국인 거리가 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 100년 역사에서 가장 애틋한 정조로 일관한 오정희의 단편 중국인 거리,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내 기억의 인천에 늘 애틋한 구름이 끼어 있는 까닭은 이 소설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숨막히는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시(市)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렸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 가루를 흘려보냈다. (중략)/ 석탄은 때로 군고구마, 딱지, 사탕 따위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석탄이 선창 주변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현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철 검정 강아지였다./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리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낮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는 소설 속의 ‘중국인 거리’는 지금 울긋불긋하게 화장한 관광처소로 바뀌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중국인 거리를 찾는 인파는 단락이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은 서너 가닥으로 나뉘면서 혹은 전통의 중국음식점 ‘공화춘’으로 들어가고 혹은 맥아덕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으로 올라가고 혹은 저렴한 물건이 잔뜩 쌓여 있는 ‘만물상’ 같은 곳으로 사라진다.
그 행렬에서 잠시 벗어나 오늘날 중국인 거리의 좌우 모든 광경을 가장 인상적으로 살필 수 있는 대형 중국음식점 ‘연경’ 2층 옆의 널찍한 마당에 앉아 있으면 오정희 소설에 묘사된 중국인 거리는 오간 데 없다. 하기야 오정희는 이 소설을 1970년대 후반에 썼고, 더욱이 소설 속의 시간은 50년대의 기억이니 그 수십 년 세월의 변천으로 인하여 예전의 중국인 거리가 실물로 남아 있기란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차라리 박제된 ‘진열장’이라면 좋으련만, 오늘날 실제의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한 큰 상처일 것이다.
중국인 거리는 비릿한 냄새가 풀풀 새어나오는 어른들의 세계, 그 생생하면서도 낯선, 오직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야만 하는 생의 존엄함과 바로 그런 숙명이 내린 비루한 욕망과 의무가 가득 찬,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 한발 한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어느 성장기의 소녀 이야기다. 오정희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장에는 너무나 큰 빈틈이 많다고 했지만 그의 후배들이 되는 신경숙 은희경 천운영 같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일부 작가는 그것을 베껴 쓰면서 절망감까지 느꼈다고 토로하는데, 그런 고백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설의 문장은 완벽하게 쌓아올린 벽돌집의 견고함과 닮아 있다. 그 어디 하나라도 꺼내게 되면, 완벽성에 흠결이 나서 견고한 벽돌집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어디 한 구절 인용하는 것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다시 그 소설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소설의 아이가 한밤에 중국인 거리 언덕 위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에 올라가는 대목이다.
‘중국인 거리’에서 성장한 오정희, 소설에 이곳 정취 자세히 담아

오정희는 ‘중국인 거리’의 적산가옥에서 성장했다. 신흥초등학교를 다녔으며, 물신처럼 버티고 선 제분공장에서 몰래 밀알을 한 움큼 훔쳐먹기도 했다.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고 미군을 상대하는 아가씨도 많았다. 서울의 어느 한적한 골목이 아니라, 당시 ‘중국인 거리’는 항만과 미군기지와 공장과 술집과 가난이 뒤엉킨, 흡사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고통과 찰나의 희열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세월의 변화는 그런 것들의 변화를 동반하였겠지만, 다만 그 형식이 다를 뿐 내용까지 완연히 달라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중국인 거리’, 그러니까 울긋불긋하게 화장한 관광명소 차이나타운은 그 모든 기억을 말갛게 가리고 있지만 말이다. 사람이 살고, 살아가고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 산통과 초경의 기억은 영영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