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어떤 일에든 제각각 ‘경지’와 ‘깨침’이 있다고 믿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의 경지가 아닌 “아하, 그게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 순간!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강원도 백담사 계곡에 단풍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맨눈보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단풍을 본 시간이 더 많다 싶을 정도로 하루 종일 사진 찍기에 몰두해 있었다.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내가 있는 곳은 산 그림자에 덮였고, 반대쪽 계곡은 가을 햇살에 단풍잎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댔다. 줌인을 한 파인더 속의 단풍잎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거리를 맞추자 단풍 빛깔이 변했다. 셔터에서 손을 떼고 파인더 속 단풍을 가만히 바라봤다. 햇빛과 바람에 따라 단풍잎의 빛깔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이것은 단풍이 아니라 빛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카메라로 찍는 것은 단풍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단풍이 발하는 빛이었다!
한 입에 뻥 강렬한 희열 느끼는 날 기다려
두근두근 가슴 저 아래에서 밀려오는 희열! 내 눈에는 그때부터 빛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빛의 세상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세상과 확연히 달랐다. 그날 저녁 백담사 계곡 밑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내 눈에는 온통 빛만 보였다. 전구 불빛만으로도 ‘빛의 천국’이었다. 내 눈길은 이 물체가 지금 어디에서 들어온 빛을 어떤 방향으로 반사하고 있는지에 온통 쏠렸다. 그 다음에는 빛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에도 명암이 있었으며 차가운 빛과 따뜻한 빛, 거친 빛과 부드러운 빛, 칙칙한 어둠과 경쾌한 어둠이 제각각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마침내 다다른 결론은 ‘세상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빛에 대한 깨달음 이후 나는 사진과 그림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다. 나처럼 빛을 본 사람의 사진과 그림이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이 사람도 빛을 보았구나. 그 희열도 맛보았겠구나. 그 희열의 잔상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찍고 저렇게 그리고 했구나.’
빛은 어느 한순간 내 가슴에 퍽 차고 들어왔지만, 글쓰기는 참 지루하게 스멀스멀 내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희열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내게는 분명한 경지에 오르는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글쓰는 일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기본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국어 문법책부터 펼쳤다. 한글이지만 무슨 놈의 문법 용어가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지…. 그래서 한 단계 더 내려가 중학교 문법책을 봤다. 다시 고등학교 문법책, 문법 참고서, 작문법 등등을 읽었다.
멋모를 때 그렇게 잘 써지던 글도 문법 공부를 하고 난 뒤부터는 한 문장을 쓰는데도 바들바들 손이 떨렸다. 바른 문장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이면서 더 큰 괴로움을 겪었다. 책을 읽을 때도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문장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글쓰기에 대한 고통을 3년 넘게 겪었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글감을 문법적 틀에 맞춰 쓴다는 의식을 하지 않아도 문법적 오류 없이 글이 술술 나오게 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린 것이다. 이후 내 글은 문법에서 자유로워졌으며, 글을 쓰면서 멈칫하는 경우는 논리 전개의 어려움을 겪을 때뿐이다.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막힘 없는 글쓰기는 분명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이 경지에 오르는 일은 자기 스스로도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그냥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문법을 의식하지 않는 나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이건 희열이 있는 일도 아니어서 어느새 그렇게 된 나를 덤덤히 바라보게 될 뿐이다.
이러한 자잘한 깨달음들로 인해 나의 인생은 퍽 즐겁다. 일종의 감각의 확장 같은 것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꽤 있었다. 어느 한순간 소리의 세계가 확 열리는데, 그때의 희열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한다. 그 깨달음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몸서리쳐지는 희열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맛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끔 맛에도 어떤 경지가 있으며, 그 경지에 오르면 강렬한 희열을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글쓰기처럼 희열 없이 부지불식간에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맛을 삶의 주제로 삼아 일해온 지 10여 년. 솔직히, 나는 아직 맛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맛에 어떤 경지가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 맛의 한 경지에 오른 듯한 분들을 만나기는 하는데, 내 느낌에는 아직 아니다.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냐고? 내가 일상에서 너무 나갔나….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강원도 백담사 계곡에 단풍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맨눈보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단풍을 본 시간이 더 많다 싶을 정도로 하루 종일 사진 찍기에 몰두해 있었다.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내가 있는 곳은 산 그림자에 덮였고, 반대쪽 계곡은 가을 햇살에 단풍잎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댔다. 줌인을 한 파인더 속의 단풍잎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거리를 맞추자 단풍 빛깔이 변했다. 셔터에서 손을 떼고 파인더 속 단풍을 가만히 바라봤다. 햇빛과 바람에 따라 단풍잎의 빛깔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이것은 단풍이 아니라 빛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카메라로 찍는 것은 단풍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단풍이 발하는 빛이었다!
한 입에 뻥 강렬한 희열 느끼는 날 기다려
두근두근 가슴 저 아래에서 밀려오는 희열! 내 눈에는 그때부터 빛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빛의 세상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세상과 확연히 달랐다. 그날 저녁 백담사 계곡 밑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내 눈에는 온통 빛만 보였다. 전구 불빛만으로도 ‘빛의 천국’이었다. 내 눈길은 이 물체가 지금 어디에서 들어온 빛을 어떤 방향으로 반사하고 있는지에 온통 쏠렸다. 그 다음에는 빛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에도 명암이 있었으며 차가운 빛과 따뜻한 빛, 거친 빛과 부드러운 빛, 칙칙한 어둠과 경쾌한 어둠이 제각각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마침내 다다른 결론은 ‘세상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빛에 대한 깨달음 이후 나는 사진과 그림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다. 나처럼 빛을 본 사람의 사진과 그림이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이 사람도 빛을 보았구나. 그 희열도 맛보았겠구나. 그 희열의 잔상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찍고 저렇게 그리고 했구나.’
빛은 어느 한순간 내 가슴에 퍽 차고 들어왔지만, 글쓰기는 참 지루하게 스멀스멀 내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희열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내게는 분명한 경지에 오르는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글쓰는 일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기본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국어 문법책부터 펼쳤다. 한글이지만 무슨 놈의 문법 용어가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지…. 그래서 한 단계 더 내려가 중학교 문법책을 봤다. 다시 고등학교 문법책, 문법 참고서, 작문법 등등을 읽었다.
멋모를 때 그렇게 잘 써지던 글도 문법 공부를 하고 난 뒤부터는 한 문장을 쓰는데도 바들바들 손이 떨렸다. 바른 문장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이면서 더 큰 괴로움을 겪었다. 책을 읽을 때도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문장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글쓰기에 대한 고통을 3년 넘게 겪었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글감을 문법적 틀에 맞춰 쓴다는 의식을 하지 않아도 문법적 오류 없이 글이 술술 나오게 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린 것이다. 이후 내 글은 문법에서 자유로워졌으며, 글을 쓰면서 멈칫하는 경우는 논리 전개의 어려움을 겪을 때뿐이다.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막힘 없는 글쓰기는 분명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이 경지에 오르는 일은 자기 스스로도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그냥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문법을 의식하지 않는 나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이건 희열이 있는 일도 아니어서 어느새 그렇게 된 나를 덤덤히 바라보게 될 뿐이다.
이러한 자잘한 깨달음들로 인해 나의 인생은 퍽 즐겁다. 일종의 감각의 확장 같은 것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꽤 있었다. 어느 한순간 소리의 세계가 확 열리는데, 그때의 희열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한다. 그 깨달음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몸서리쳐지는 희열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맛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끔 맛에도 어떤 경지가 있으며, 그 경지에 오르면 강렬한 희열을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글쓰기처럼 희열 없이 부지불식간에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맛을 삶의 주제로 삼아 일해온 지 10여 년. 솔직히, 나는 아직 맛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맛에 어떤 경지가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 맛의 한 경지에 오른 듯한 분들을 만나기는 하는데, 내 느낌에는 아직 아니다.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냐고? 내가 일상에서 너무 나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