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8

2003.06.12

‘말레이시아 허준’ 여기 있소!

맨손으로 성공 ‘은산한의원’ 개원 이병근씨 … 9월엔 중국 한의사 면허시험 도전

  • 우길/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입력2003-06-04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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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 허준’ 여기 있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다툭’ 작위를 받은 은산한의원 이병근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한의원 직원들.

    켈랑강과 곰박강의 흙탕물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Kuala Lumpur). ‘진흙의 하구’라는 뜻의 이 도시는 보통 KL이라 표기한다. 2020년 사이버도시를 꿈꾸는 인구 350만명의 KL에는 약 2500명의 한국사람이 살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암팡 지역에 사는데, 암팡 애버뉴 콘도(말레이시아에서는 아파트 단지 안에 수영장, 헬스클럽, 사우나, 테니스장, 놀이터 등 위락시설을 갖춰놓은 주거지를 콘도라 부른다)에만 약 300가구가 집단 거주하며 한인촌을 형성하고 있다. 그 300여 가구 중 절반 가량이 자녀들의 조기유학 때문에 이곳에 머물고 있는 ‘기러기 가족’이다. 암팡 애버뉴 콘도는 40평 기준 월세가 1800링깃(약 57만원)이라고 한다.

    12년간 ‘노가다 인생’ 가장 큰 밑천

    암팡 한인촌에는 50여개의 한인 상점이 밀집해 있는데, 현재 한두 업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KL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주로 하는 사업은 여행, 무역, 건설업인데 사스(SARS·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 여파로 월평균 3000여명에 달하던 한국 관광객의 발길이 완전히 끊겨 대부분 현지화에 실패한 상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파로 KL 한인촌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입국한 1000여명의 중국교포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맨손으로 이곳에 와서 현지화에 성공한 한국인이 있다. 이병근씨(41)가 그 주인공이다.

    이씨는 시골 소작농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씨의 어머니는 배까지 부른 상태에서 어린 자식들을 업고 메고 끼고 행상에 나섰지만 조부모에다 외조모까지 모시는 형편이라 집안살림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관리사원으로 사우디, 예멘에서 4년간 근무하다 귀국하던 1989년 12월, 그는 경유지인 홍콩에서 말레이시아 근무를 자청했다.

    ‘말레이시아 허준’ 여기 있소!

    현대건설이 완공한 13.4km의 페낭대교.

    “아마 그때 같이 귀국하던 동료들이 저를 돈에 미친 놈으로 알았을 겁니다. 4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는데 제 나라를 코앞에 두고 돈 좀 더 벌겠다고 혼자 타국 땅에 남았으니까요. 딱해 보였는지 동료들이 달러를 얼마씩 걷어서 주더라고요.”



    그런데 말레이시아에서 첫 월급을 받아보니 오지수당 2만5000원이 빠져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오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말레이시아 동해안 트렝가노의 현대건설 가스 생산공장 건설 현장에서 2년 반 동안 근무한 후 독립했다. 당시 말레이시아에는 육원건설, 삼성건설, 대림건설, 현대건설 등 한국 건설업체가 다수 들어와 있었는데 이씨는 이들로부터 공사를 수주받아 인건비가 싼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노동자 900여명을 고용해 공사를 했다. 5000만원짜리 시설물 공사부터 최근 마무리한 20억원짜리 올림픽프로젝트까지 12년 동안 정신없이 ‘노가다 인생’을 살았다. 덕분에 연평균 매출 100억원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의 하청 건설업체가 됐다.

    ‘말레이시아 허준’ 여기 있소!

    사스 때문에 한산한 말레이시아 페낭의 여행자 거리 출리아 스트리트. 콸라룸푸르 암팡에 있는 한인상가. 콸라룸푸르 번화가 빈땅워크에서 한국산 휴대전화를 고르는 젊은이들(왼쪽부터).

    “제가 이곳에 왔을 때 현대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다른 나라 건설업체들이 두손든 페낭대교 공사를 컨테이너로 바닷물을 막는 신공법으로 해냈거든요. 그 바람에 건설 경기가 좋았지요. 다음에는 삼성이 떴어요. 세계 최고라는 KL의 쌍둥이 빌딩 KLCC 중 하나는 일본이, 하나는 삼성과 극동이 건설을 맡았는데 한국 건설업체가 일본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더 빨리 공사를 끝냈어요. 또 쌍둥이 빌딩 사이에 다리를 놓는 공사를 할 때 일본이 자신 없다고 포기했는데 삼성이 나서서 삼각공법이라는 신기술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42층까지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다리를 놓았어요. 그때가 한국에서 다리 무너지고 백화점 무너지고 하던 때라 온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한국 건설회사에 일을 맡긴 게 잘못이라고 난리치고 했는데 삼성이 그 일을 해낸 겁니다. 그 공사에 대한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었거든요. 공사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을 정도니까요. 공사가 제대로 끝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본 마하티르 총리가 ‘역시 한국사람’이라며 감탄했지요.”

    예우와 존경 ‘다툭’ 작위도 받아

    그러나 이씨는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건설공사 수주경쟁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슈퍼마켓이었다. 4억원을 투자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암팡 지역에 150평 규모의 ‘필마트’를 열었다. 한국의 경방필 백화점과 손잡고 아이템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했다. 이어 20억원을 투자해 중국 옌지에 고추장, 된장, 건조식품 등을 생산하는 식품공장을 세웠다. 한국의 경방필 백화점에서 유효기간에 맞춰 보내오는 물건들과 자신의 옌지 식품공장에서 생산해 최고 30%까지 싸게 파는 식품들 덕분에 슈퍼마켓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경쟁에서 밀린 주변의 한국 슈퍼마켓 세 곳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에 있는 동생을 불러들여 필마트의 경영을 맡겼다. 이씨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이씨는 몸이 아픈 아버지를 따라 자주 한약방에 갔다. 약재 냄새가 그윽한 한약방에서 아버지의 맥을 짚는 한의사를 보며 막연하게 ‘크면 이렇게 좋은 냄새 속에서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한의사가 돼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가난해서 감히 넘볼 수도 없었던 꿈을 그는 30대 중반에 마침내 이뤄냈다.

    옌지에서 식품공장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 이씨는 창춘 중의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 달의 보름은 창춘에서 강의를 듣고 나머지 보름은 KL에서 인터넷으로 리포트를 제출하며 어렵게 공부해 97년 졸업했다. 한의사 면허시험을 치르려면 최소 1년 반 동안 임상실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중국 출장을 갈 때마다 3~4시간씩 실습했다. 그리고 그 열정으로 드디어 면허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었다. 그는 2003년 9월 한의사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시험을 치르기 전 교수님을 직접 KL로 모셔와 최종실습을 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이씨는 이미 2003년 2월 암팡에 2억원을 투자해 말레이시아 최초의 한국 한방병원 ‘은산한의원’을 개원했다. 지금은 내과 1명, 침구 및 외과 1명, 물리치료 및 경락 1명 등 중국 한의사 2명과 한국 한의사 1명이 환자를 보고 있는데 자신도 공부를 마치면 이곳에서 직접 진료할 생각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영국식 명예호칭인 작위제도가 있다. 말레이시아 13개 주 중 술탄이 있는 9개 주에서 9명의 술탄 가운데 선발되는 국왕은 ‘양 디 피투안 아궁’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리고 로열 패밀리들에게는 툰구, 라자, 운쿠 등의 칭호가 붙는다. 그밖에 왕실과 관계없는 작위로 툰, 탄스리, 다툭, 다토 등이 있다. 공작, 백작, 남작, 자작 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은 말레이시아 어디를 가더라도 먼저 자리를 배치받고 왕실 행사에 초청받는 등 국민들로부터 예우를 받고 있다. 99년 이씨는 말라카주 경제개발 담당 고문으로 공장이나 기업 유치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다툭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의 꿈은 한국으로 돌아가 허준과 같은 명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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