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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인 기자의 ‘아저씨, 보기 흉해요’

‘아메리칸 스따일’ 말투 ‘쿨’커녕 ‘왕짜증’

‘아메리칸 스따일’ 말투 ‘쿨’커녕 ‘왕짜증’

“이 리포트, 너무 앱스트랙트(abstract)하지 않아요? 좀더 애큐릿(accurate)하고 콘사이스(concise)하게 리바이즈(revise)하세요.”

그냥 “보고서가 추상적이니 더 명확하게 줄이라”고 하시면 될 것을, 별명이 ‘아륀지’인 오 실장님은 사용하는 문장마다 꼭 두세 개의 토플용 영어 단어를 집어넣는다. 한국인이 취약하다는 F 발음이나 R 발음 등에도 특별히 신경 써주시는 것은 기본. 영숙어 또는 한국말이라도 전언(傳言)을 할 경우엔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쿼테이션(quotation)’임을 친절히 알리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이래서 한국은 안 돼”와 “미국 애들은 말이야…”라는 말도 빈번히 사용하시는 오 실장님은 지금부터 10여 년 전 6개월짜리 해외연수를 다녀오신 바 있다. 그 시절 선진문명이 준 충격이 달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어 때문에 고생한 것에 한이 맺혀서일까. 오 실장님의 ‘아메리칸 스따일’은 어쨌든 그렇게 10여 년을 넘어섰다.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아침엔 국물 없이 밥을 넘기지 못하는 까다로운 토종 식성, 회의시간에 아랫사람이 대들면 “어디서 상사에게 눈을 부라리냐”며 호통치는 동방예의지국의 근성 정도가 아닐까.

“今日 三時 會議에 全員 必參을 要請합니다.”

오 실장님이 친영(親英)파라면, 천 부장님은 친한(親漢)파다. 유서 깊은 양반가 출신이라는 천 부장님은 명함은 물론 보고서, 팀원들에게 보내는 e메일에까지 한자 쓰기를 즐겨 하신다. 신문에서 “멍청한 요즘 애들 때문에” 한자가 줄어드는 것을 개탄하는 그는 꼭 자신이 쓰는 글에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한글을 한자로 일일이 전환한다. 그의 이렇듯 특별한 한자 사랑에 대해 주변에서는 20여 년 전 사법시험 도전에 거듭 실패한 뒤부터 겪고 있는 후유증이라고 수군거리지만, 어쨌든 천 부장님 본인이 그토록 한자를 애용하는 명분은 “정확한 의미 전달”과 “품위 있는 언어생활”이라고 한다. 다만 요새 ‘품위 없는’ 젊은 사원들이 부장님이 보낸 문서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힘겨워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오 실장님이나 천 부장님처럼 이른바 ‘배우신’ 분들 중에는 자신의 ‘남다른 격’을 말투나 글투로 드러내는 분이 많다. 소통하는 방식은 취향의 영역이다. 영어로만 대화하든, 한자만 쓰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더불어 어떤 취향이 다른 취향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판단할 기준도 없다. 단, 어떤 취향들은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더불어 그런 피곤한 취향을 가진 상사의 말글을 해석해야만 할 때 아랫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배가된다. 혹시 당신, 21세기 한국어 사용자들의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진 않은가. 이제는 살짝 교정을 권한다. 그리고 그 말투,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쿨~’하진 않다.



주간동아 2008.05.27 637호 (p65~65)

구가인 기자의 ‘아저씨, 보기 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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