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4

2007.07.17

하마스 “봤지, 우린 과격하지 않아”

BBC 기자 석방 드라마로 이미지 개선 … 막후협상 영국은 실체 인정 ‘딜레마’

  • 코벤트리 =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9mail.com

    입력2007-07-11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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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스 “봤지, 우린 과격하지 않아”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오른쪽)가 석방을 기념해 존스턴 기자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에 납치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영국 BBC 특파원 앨런 존스턴이 4개월 만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인 하마스와 이번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슬람 군대’, 영국 정부 간 막후협상의 결과다. 그렇다면 앨런 존스턴의 석방은 영국의 중동 외교능력을 보여준 쾌거인가?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앨런 존스턴 납치사건의 최대 피해자였던 BBC조차 존스턴 기자의 석방 과정에서 최대 승자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언론인 납치 하마스가 최대 승자

    하마스는 지난해 팔레스타인 총선 승리를 통해 합법성을 확보해놓고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력의 대화 거부로 외교무대에서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영국 정부와의 대화를 이끌어냈고, 납치세력에게서 존스턴 기자를 구출하는 ‘드라마’를 연출함으로써 과격 이미지를 벗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뿐만 아니다. 서방으로부터 대화 파트너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존스턴 기자를 집으로 데려가 팔레스타인 전통식 조찬을 베풀며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과시했다. 존스턴 기자 역시 하마스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여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됐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내에서 하마스의 정치적 라이벌인 파타당만을 인정해온 영국 정부로서는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니야는 영국 정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존스턴 기자의 석방을 위해 예루살렘 주재 영국 총영사가 가자지구를 방문하는 등 하마스와의 대화에 나선 것을 두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운 것이다.

    곤혹스러운 쪽은 오히려 영국 정부였다. 데이비드 밀리번드 외무장관의 반응부터가 어정쩡했다. 그는 존스턴 석방 노력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파타당 압바스 수반의 이름을 먼저 언급한 뒤 ‘또한 이스마일 하니야를 포함한’ 하마스 지도부에도 감사한다는 성명을 냈다.

    하니야와 정적관계인 파타당 압바스 수반 측의 반응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압바스 진영은 하마스 측이 존스턴 기자 납치단체인 ‘이슬람 군대’와 이번 사건을 막후에서 조율한 것 아니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극렬 무장단체로 낙인찍힌 하마스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연출한 사건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명의 무장군인을 동원해 존스턴이 억류돼 있던 건물을 에워싼 뒤 납치범들을 압박해 석방 담판을 이끌어낸 정황을 보면 압바스 진영의 음모설에 손을 들어주기도 힘든 형편이다.

    영국 정부는 그동안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하마스를 어떻게 다룰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게다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미국 러시아 유엔 유럽연합 등 4자가 주도하는 중동평화 프로세스를 책임질 특사로 임명돼 활동을 개시하려던 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스턴 기자가 석방된 날 저녁 B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뉴스나이트’에 출연한 친(親)하마스 진영의 중동 전문가 아잠 타미니는 블레어의 중동정책을 맹공했다. 그는 “중동 지역의 누구도 블레어 특사를 환영하지 않는다”며 “블레어는 유럽연합으로 하여금 하마스에게 경제제재를 하게 한 친이스라엘 정책 지지자가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동 지역서 실질적 영향력 과시

    존스턴 기자의 석방 과정에서 영국 정부가 빠진 딜레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3월 영국 해군 병사 15명이 이라크 해역에서 이란 측에 납치됐다가 13일 만에 석방된 사건을 연상시킨다. 당시 이란 측은 영국 해군과 함정이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며 납치한 뒤 TV 화면을 통해 이들이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는 장면을 잇따라 내보내면서 영국의 자존심을 긁어놓았다.

    사태 초기만 해도 당시 블레어 총리는 미국과 유럽연합을 등에 업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추진하는 등 이란에 대한 압박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국제사회 반응이 미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블레어 총리는 ‘조용한 외교’로 태도를 바꾸었고, 결국 물밑협상 끝에 이들의 석방을 얻어낼 수 있었다.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부활절 아침 갑작스레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의 석방을 발표하면서 “이란이 영국인에게 주는 부활절 선물”이라며 호기를 부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해군 병사에게 양복 한 벌씩을 사 입혀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주면서 블레어 총리의 속을 타들어가게 했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굴욕과의 전쟁’이라며 총리실 측의 ‘오락가락 외교’를 비판했다. 외교력을 동원한 성공적 석방 협상이라는 표면적 결과에도 영국 정부가 입은 상처는 씻기 힘들었다.

    하마스가 존스턴 기자 석방을 통해 노린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알 카에다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존스턴 납치범들과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마스가 법과 질서를 존중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데는 ‘언론인 납치사건’이라는 뉴스만큼 호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 석방 협상이 하마스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러시아, 유엔 유럽연합 등 중동평화 프로세스를 이끌고 있는 중추세력은 여전히 비폭력과 이스라엘 인정 등 협상 참여 파트너에 대한 자격요건을 거두지 않고 있다. 물론 하마스는 아직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 석방 과정에서 보여준 이미지 개선으로 하마스가 교두보를 마련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4개월을 끌었던 이번 사건의 마지막 승리자는 납치세력도 존스턴 기자도 영국 정부도 아닌, ‘중재자’ 하마스라는 분석이 점점 설득력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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