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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국내 유일 두루미 연구자 이기섭 박사

“단아한 자태에 빠져 평생 緣 맺었죠”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단아한 자태에 빠져 평생 緣 맺었죠”

“단아한 자태에 빠져 평생 緣 맺었죠”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구시로 습지는 풀이 모여 숲이 된 곳이다. 3000년 전 지금의 모습이 된 이 습지는 태고의 자연을 품은 순수의 땅. 여우와 사슴이 곳곳에서 수런거렸고, 습원 위로는 두루미가 날갯짓을 했다.

습지에 내려앉은 두루미가 춤을 춘다. 학무(鶴舞)다. 다릿짓은 절로 무(舞)를 이끌고, 춤은 도(蹈)가 되어 휘돌아 나간다. 두루미는 이 습지의 주인이다. 텃새다. 단정학(丹頂鶴)의 고결함은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처럼 소란스런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쯧쯧. 일주일 전에 홋카이도에서 두루미를 처음 보셨다고요? 그곳에 두루미가 900마리쯤 서식합니다. 환경이 워낙 좋다 보니 독특하게도 텃새가 됐죠.”

국내 유일의 두루미 연구자 이기섭 박사(45·한국환경생태연구소 서울사무소장)가 “서른이 넘도록 두루미 한 마리 못 봤느냐”면서 기자에게 면박을 준다. “연하장에선 수도 없이 많이 봤다”고 농을 치자, 이 박사는 “e메일로 새해인사를 하면서부터 두루미 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되받았다.

이 박사는 ‘두루미에 미친’ 사람이다. 2000년 늦깎이로 박사학위(조류생태학)를 받은 뒤 두루미 연구에 천착해왔다. 전국의 두루미 도래지를 누빈 게 올해로 6년째. 두루미를 보기 위해 ‘야외’(이 박사는 현장조사를 야외라고 말한다)를 나갈 때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런데 왜 하필 두루미였을까?



“우연이었어요. 아니, 필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연구소에 들어간 뒤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철원의 두루미 연구였어요. 철원에서 두루미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그 단아함과 우아함에 흠뻑 매료됐죠.”

이 박사는 경희대에서 석사를 마친 뒤 10년 넘게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다. 새에 매료돼 유학을 떠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일과 공부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학위를 받는 데 7년이 걸린 까닭이다. 이 박사의 스승은 활발한 방송활동으로 익숙한 경희대 윤무부 교수. 윤 교수의 스승은 1세대 조류학자인 원병호 교수다. ‘경희학파’라는 말이 있을 만큼 조류 연구에서 이 대학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천운이었죠, 두 분 선생님한테 새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교사 하다 늦깎이 공부 … 철원서 생태 관찰하며 매력에 푹

두루미는 한반도를 찾는 철새 중에서도 ‘진객(珍客)’으로 꼽힌다. 한국은 두루미의 월동지요 경유지다. 한국을 찾는 녀석들은 크게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 등 3종.

11월부터 2월 말까지 한반도에 둥지를 트는 두루미는 DMZ(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에서 생활한다. 이 박사의 탐조에 따르면 철원 600마리, 연천 100마리, 강화 20마리, 파주 2가족(4~5마리)이 한반도를 찾는다. 여기에 중국에서 월동하는 1000마리와 홋카이도에 사는 녀석들을 더하면 멸종의 벼랑에서 살아남은 전 세계 두루미 수가 나온다.

“단아한 자태에 빠져 평생 緣 맺었죠”
“일반인들은 두루미를 쉽게 볼 수 없어요. 철원의 두루미는 DMZ에서 잠을 자고 민통선 지역에서 먹이를 먹습니다. 강화에 내려앉는 녀석들은 DMZ에서 밤을 보내고 개펄에서 먹이를 찾아요. 게, 갯지렁이를 잡아먹는 녀석들에겐 제가 ‘갯두루미’라고 새로 이름을 붙여주었죠.”

두루미는 한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짝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금슬을 자랑하는 다른 새들이 대부분 짝짓기할 때만 ‘찐하게’ 사귀는 반면, 이들은 평생 짝을 지어 다니는 ‘닭살 부부’다. 이 박사가 두루미에 깊이 빠진 ‘진짜 이유’는 ‘사람보다 더 진한’ 가족애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루미는 철이 바뀔 때마다 가족과 함께 2000여 km의 대장정에 나섭니다. 거의 모든 녀석들이 짝이 있는 터라 배우자를 잃은 두루미는 ‘재혼’하기도 쉽지 않아요. 부부의 금슬과 자식 사랑엔 경건함까지 느껴집니다. 사람들도 모두 학처럼 사랑하며 살면 좋을 텐데….”

두루미라는 말은 ‘뚜루루’라는 울음소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두루미 부부는 ‘마주 운다’. 두 녀석이 동시에 울어 마치 한 마리가 우는 것처럼 들리는 ‘마주 울기’ 소리는 청아하면서도 따뜻하다. 오래 해로한 부부일수록 화음이 더 아름답다는 게 이 박사의 설명이다.

이 박사는 “물에 발을 담그고 ‘꼿꼿하게’ 잠을 자는 재두루미(灰鶴)는 청회색 도포를 입은 선비”라고 했다. 재두루미는 세계적으로 6000마리 정도 남아 있는데, 몸 대부분이 흰색인 두루미와 달리 청회색을 띠고 있어 재두루미라는 이름을 얻었다. 재두루미를 높게 치는 일본에선 진학(眞鶴)이라고도 부른다.

“단아한 자태에 빠져 평생 緣 맺었죠”

강원도 철원평야의 두루미.

“재두루미는 10월 중순부터 한강하구에 500마리, 철원평야에 2500마리가 내려앉아요. 낙동강에서도 관찰되는데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은 뒤 일본 이즈미시로 가는 녀석들이죠. 이즈미시는 두루미들에겐 천국 같은 곳입니다.”

이즈미시는 전 세계 재두루미의 50%(3000마리), 흑두루미의 90%(1만 마리)가 겨울을 나는 곳이다. 한반도의 두루미는 날로 줄어드는 반면 이곳의 두루미는 꾸준히 늘고 있다. 지방정부와 주민들이 두루미 보호에 소매를 걷어붙인 덕분인데, 이 박사는 “한국에 내려앉던 두루미들이 이즈미시로 옮겨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잠자리인 DMZ와 먹이터인 민통선이 없었더라면 두루미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거예요. 현재처럼 개발이 계속되면 10년 뒤에는 김포 같은 곳에선 재두루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계속된 매립으로 습지가 사라지는 게 가장 큰 문제죠. 관광상품으로 두루미를 이용하는 이즈미시처럼 사람과 두루미가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외사랑의 대상인 두루미가 줄어들까 노심초사하는 이 박사는 환경단체 관계자, 습지연구자들과 함께 두루미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두루미의 고향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아무르강 유역의 대습원입니다. 웅혼한 고구려의 기상과 발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죠. 두루미가 겨울을 지내는 곳은 백제와 신라의 영토였고요. 두루미는 조상들과 함께 수천년 동안 이 땅을 지켜온 민족의 새입니다. 후손들에게 두루미를 물려주는 건 우리 세대의 의무예요.”

추석 연휴가 끝나면 재두루미가 한강하구와 철원평야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이 박사는 ‘야외’로 한동안 바쁠 것 같다.



주간동아 556호 (p68~69)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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