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6

2006.10.17

미국 vs 영국 세계은행서 한판 붙다

美 월포위츠 총재 ‘반부패 개혁안’ 추진하자 英 힐러리 벤 장관 강력 제동 걸며 ‘갈등 촉발’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6-10-11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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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중순 싱가포르에서 폐막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orld Bank) 연차총회의 여진이 영-미 간 신경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세계은행이 아시아 및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지원 사업에서 수혜국 정부의 부패 관행을 문제 삼아 자금 지원 조건을 강화하는 ‘반부패 개혁안’을 추진한 일이었다.

    24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세계은행 개발위원회는 이번 연차총회에서 폴 월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내놓은 반부패 보고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개발위원회는 일단 이 보고서를 채택하면서도 내용을 보완해 내년 봄 다시 위원회에 보고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개도국 회원국의 부패 정도와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연계한다는 월포위츠 총재의 구상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의 구상이 자칫 개도국 지원 사업을 자의적으로 통제하는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란’에 총대를 멘 사람은 영국의 힐러리 벤 국제개발부 장관이었다. 그는 연차총회 개회 직전, 월포위츠 총재가 ‘부패-개도국 지원’ 연계안을 밀어붙일 경우 영국의 세계은행 분담금 5000만 파운드(약 900억원)의 출연을 보류할 수도 있다고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월포위츠를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연차총회의 결론은 일단 반(反)월포위츠를 내세운 유럽연합 측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사태를 주도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벤 장관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신공격 주고받으며 신경전 거세져

    그러나 이번 파문으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월포위츠 총재 측이 반격을 개시하면서 사태는 확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연차총회가 끝난 후 며칠 뒤 세계은행 고위관리들이 벤 장관의 세계은행 비판에 대해 ‘영국 노동당 부당수를 노리는 그의 정치적 출세욕이 빚어낸 작품’이라며 직설적인 인신공격을 퍼붓고 나선 것이다.



    월포위츠 총재의 의중을 반영해온 세계은행 고위관리들은 벤 장관이 총회가 열리는 싱가포르에서 공개적으로 세계은행 측을 공격한 것을 두고 ‘배고픈 언론에 날고기를 던져준’ 전형적 언론플레이라며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이들은 ‘이라크전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월포위츠 총재가 영국의 중도좌파 정치인들에게는 가장 만만한 목표였을 것’이라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게다가 세계은행 측의 이러한 ‘막말’을 그대로 전한 것은 미국 언론이 아닌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였다. 워싱턴이 런던을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러나 세계은행 측의 신경질적 반응에 대해 영국 국제개발부는 세계은행의 후진국 지원 조건은 벤 장관 취임 당시부터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였다는 점을 강조할 뿐 추가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영국 측은 이번 연차총회를 통해 ‘세계은행의 반(反)부패 정책이 개도국들에 공평무사하게 적용되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했을 뿐 아니라, 세계은행 내에서 유럽연합을 대표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 또한 챙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은행의 뒤늦은 ‘화풀이’에 정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셈이다. 파문의 당사자였던 벤 장관 역시 자신을 겨눈 월포위츠 총재 측의 비난은 무시한 채 노동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맨체스터로 향했다. 대신 ‘가디언’ 등 진보 성향의 영국 언론들은 월포위츠 총재가 취임 당시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개발 원조 제공 조건을 완화하기로 약속했지만, 이를 이행하기는커녕 일부 후진국에 대한 원조액을 삭감했다며 월포위츠의 독선적인 스타일을 비판하고 있다.

    결국 벤 장관의 ‘세계은행 출연금 중단 시사’ 발언과 이에 대한 월포위츠 총재 측의 직접적 반격으로 촉발된 이번 파문은 냉전 붕괴 이후 개도국 지원 조건을 둘러싸고 논란을 거듭해온 선진국 내부의 갈등과, 임명 당시부터 미국 내에서조차 반발을 불러왔던 미 국방부 부장관 출신인 월포위츠 총재 측의 ‘야심’이 맞물려 빚어낸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은행 독단에 대한 반감 표출 견해도

    냉전 붕괴 이후 미국 내 보수진영의 대외정책을 대변해온 월포위츠 총재나 그가 이끄는 세계은행은 ‘부패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개도국 원조는 부패 정권의 생명만 연장시켜줄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개도국 지원-부패’의 연계 전략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계 전략에 우려를 표명해온 영국과 유럽연합, 그중에서도 개도국 지원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는 비정부기구 등은 “개도국의 부패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이를 빌미로 당장 굶어 죽어가는 빈민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개도국 빈곤층 지원과 부패 척결은 함께 해결되어야 할 과제”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개도국의 부패는 경제 운용 전반에서 나타나는 한 측면에 불과한데도 세계은행이 이를 꼬투리 잡아 이들 나라의 경제정책 전반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영국의 비정부기구인 옥스팜(Oxfam)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계은행으로부터 최근 개발원조를 받은 20개 개도국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15개 나라가 자금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공공 부문의 민영화를 요구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월포위츠 총재는 취임 이후 해당국 정부의 부패를 이유로 방글라데시, 케냐 등에 대한 경제 지원을 유보하는 조치를 취하고 에티오피아 등 일부 지원 대상국에 대해서는 원조액을 삭감한 바 있다. 이번 파문은 세계은행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누적돼왔던 반감이 표출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하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 내 보수파의 시각을 대변해온 월포위츠 총재가 이번 파문으로 인해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계은행 고위관리들의 독설을 ‘육성중계’함으로써 파문 확산의 진원지가 됐던 파이낸셜타임스조차 며칠 뒤 사설을 통해 세계은행 측의 이러한 맞대응이 현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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