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3

2006.09.19

강남 유명 병원의 진료기록부 실종 사건

담당 의사·병원 “나 몰라라” … 라식수술 받은 환자들만 “나 어떡해”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6-09-13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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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유명 병원의 진료기록부 실종 사건

    라식수술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는 어디로 갔을까? 의사들의 이합집산이 잦은 서울 강남의 병원가에서는 진료기록부를 분실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7월 말 이모(33) 씨는 백내장 수술을 앞두고 ‘진료기록부 찾기 소동’을 벌여야 했다.

    1997년 서울 강남의 A병원에서 라식수술을 받았던 그는 이 병원으로 진료기록부를 받으러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병원 측으로부터 “진료기록부가 없다”는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 병원 측은 안과 원장으로 재직했던 B 원장이 병원을 그만두고 개업하면서 자신이 수술했던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를 모두 가져갔으니 B 원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이 씨는 서울 강남에 있는 B 원장의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B 원장은 “나는 진료기록부를 가지고 나온 적이 없다”며 “진료기록부는 A병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이 씨의 아내는 강남보건소 인터넷 게시판에 이 일을 하소연했다. 며칠이 지나도 답변이 없어서 직접 보건소에 전화를 거니 비로소 담당자로부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경찰은 사실 확인 못해 무혐의 결정

    “보건소 담당직원은 진료기록부가 왜 없어졌는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미 지난해 가을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고요. 단지 B 원장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병원은 진료기록을 10년 동안 보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반했을 경우에는 자격정지 1개월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 씨가 라식수술을 받은 것이 1997년이니 A병원은 명백하게 의료법을 위반한 셈이다.

    이 씨에게 진료기록부는 백내장 수술을 위해 꼭 필요한 자료였다.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K값’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K값이란 각막곡률반경데이터, 즉 각막의 모양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백내장 수술에서 눈에 삽입하는 인공수정체의 도수를 산정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K값이 필요하다. 하지만 라식수술로 각막의 일부를 깎아낸 사람에게서는 K값을 정확하게 산출해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라식환자는 라식수술 전 K값을 기록해놓은 진료기록부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는 병원들이 라식수술 후 환자에게 K값을 적어주어 환자가 보관하도록 하는 추세다. 안과개업의 이모 씨는 “K값을 적은 카드를 환자에게 주면서 집문서와 함께 보관하라고 당부한다”고 했다. 그는 “정확한 K값이 없어도 백내장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K값이 있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병원의 라식환자 진료기록부 실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이 씨뿐만이 아니다. 이미 지난해 10월 A병원은 ‘B 원장이 2004년 12월 라식수술을 받은 환자 노모 씨 등 9명의 진료기록부를 폐기하도록 간호조무사에게 지시했다’는 내용으로 강남보건소에 조사를 요청했다. 강남보건소 의약과 이민숙 주임은 “당시 A병원으로 조사를 나갔는데, 폐기 지시를 받았다는 간호조무사가 병원을 그만둔 뒤여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B 원장도 A병원의 주장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고 했다. 이 주임은 “아무튼 A병원 병원장과 B 원장 사이의 감정적 대립이 심각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강남경찰서로 기관 이첩됐지만, 강남경찰서도 별다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채, 3월에 이 사건을 ‘혐의 없음’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강남 유명 병원의 진료기록부 실종 사건

    라식수술 장면.

    현재도 A병원과 B 원장은 ‘진료기록부 실종’에 대해 서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A병원의 병원장은 “B 원장이 진료기록을 갖고 나가고 싶어했지만 의료법상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발생해 나도 황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보건소에 조사를 의뢰하는 것으로 우리 병원은 할 일을 다 했으며, 정말 B 원장이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병원 수리다, 세무조사다 해서 진료기록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없어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의료법상으로 내가 책임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환자들이 고발을 하든 알아서 하라”고 덧붙였다.

    B 원장은 기자와의 통화를 거부했다. 다만 그의 병원 사무장을 통해 “A병원의 진정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기관으로부터 무혐의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밝혀왔다. 이 사무장은 “많은 환자들이 우리 병원에 찾아와 진료기록부를 요구하는데, 우리로서는 참으로 난감하다”고 덧붙였다.

    환자들의 진료기록부가 의료법상 보관의무 기간이 경과하지 않았는데도 사라지는 일은 A병원의 일만이 아니다. 법무법인 한강의 홍영균 변호사는 “특히 서울 강남 일대에서 고가 시술을 펼치는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 치과 등의 경우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들의 이합집산과 개·폐업이 잦기 때문에 그 와중에 진료기록이 분실되는 일이 꽤 자주 발생한다”고 말했다. 홍 변호사는 “최근에는 치아교정 치료를 받은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환자의 진료기록이 분실되어 곤란한 처지에 처한 치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백내장 수술 때 근거자료 없어 피해 우려

    의사들이 이합집산을 하면서 진료기록부 때문에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이 진료한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를 가지고 나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의료법상 진료기록부 보관 책임은 병원장(동업관계라면 대표로 등재된 의사)에게 있기 때문에 병원장들은 이를 거부한다. 이러한 갈등이 가장 원활하게 해소되는 방법은 ‘진료기록부의 원본은 병원장이, 사본은 담당의사가 갖는다’는 약정서에 서명하고 헤어지는 것.

    이 씨는 결국 자신의 정확한 K값을 모르는 채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현재 그의 시력은 0.1에 불과하다. 이 씨의 아내는 “수술한 의사로부터 ‘정확한 K값을 알았더라면 시력이 좀더 높게 나올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2001년 역시 A병원에서 B 원장에게 라식수술을 받은 또 다른 이모(여·33) 씨도 최근 ‘진료기록부가 없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A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 그의 진료기록부도 없었다. “언젠가 저도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라식수술을 한 사람들은 백내장이 빨리 온다고 하던데, 걱정됩니다. A병원에서 라식수술을 받은 건 이 병원이 강남에서 라식수술을 많이 하는 병원으로 유명했기 때문인데….”

    보건소와 경찰까지 나섰지만 여전히 A병원의 라식수술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는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고도, 책임을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 와중에 애꿎은 환자들만 두 병원을 오가며 피해를 입고 있다. 진료기록부와 함께, 의사들의 양심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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