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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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발 땐 ‘대물’ 처벌 땐 ‘피라미’인가

‘산업스파이’ 검거 국정원 활약 … “대부분 미수 사건에 억울” 기술인들 하소연

  • 송홍근 기자 carrot58@donga.com

    입력2006-09-13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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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발 땐 ‘대물’ 처벌 땐 ‘피라미’인가
    구글(www.google.com) 검색창에 ‘국정원, 산업스파이’를 입력해 뉴스를 검색해보자. 산업스파이를 검거했다는 수백 건의 국정원발(發)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말 한 마디가 2300억원 기밀유출 단서로 … 산업스파이戰 현장’ ‘최첨단 휴대전화 기술, 1조원대 유출될 뻔’ .

    이번엔 이공계 엔지니어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에서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다.

    ‘검거되신 분들만 괜히 불쌍하군요. 마녀사냥의 본보기로 심하게 매질당할 것 같습니다’ ‘직장을 옮겼다는 이유만으로 압수수색을 하다니…’.

    국정원이 2003년 이후부터 올해 6월 말까지 적발한 해외 기술유출 적발사례(거의 모두 미수 사건이다)는 총 72건. 업계 추산을 근거로 한 국정원 발표대로라면 90조원에 달하는 피해를 예방하는 개가를 올린 셈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인들은 산업스파이 관련 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통계에 거품이 끼어 있다고 여긴다. “무리한 기소와 구속으로 엔지니어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으며, 홍보를 위해 산업스파이 사건의 피해액을 국정원이 부풀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직할 곳을 알아본 게 죄가 되나요? 개인 컴퓨터에 회사 자료 한두 개쯤 없는 엔지니어가 있을까요?”

    피해 예상액 부풀리는 해당 업체

    2004년 말, A사의 6세대 TFT-LCD 컬러필터 공정기술을 외국에 유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R 씨. A사에 1조3000억원의 피해를 안길 뻔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파렴치범으로 몰린 그는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적발 땐 ‘대물’ 처벌 땐 ‘피라미’인가
    “1조3000억원대 손실 예방이라는 보도를 보고 저는 다른 사건을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제 얘기더라고요. LCD 부품 하나에 1조3000억원이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계산하면 1조3000억원이 될 수 있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1조3000억원’이라는 예상 피해액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1조3000억원은 R 씨가 유출하려 했다는 컬러필터가 아닌 6세대 TFT-LCD의 예상 매출액 전체를 토대로 계산한 것이다. 7세대 기술이 등장한 상황에서 6세대 LCD의 ‘일개 부품’인 컬러필터 기술 유출에 따른 손실액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국정원이 발표하는 예상 피해액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계산된다. 국정원은 “우리가 발표하는 예상 피해액은 피해를 입을 뻔한 해당 업체가 추산한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한 산업보안업체 관계자는 “해당업체가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예상 피해액을 크게 부풀리고, 그걸 국정원이 그대로 발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R 씨는 서울구치소에 5개월 남짓 수감돼 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검찰이 기술유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채 기소해 아직까지도 1심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1심 재판에서 유죄를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R 씨는 무죄를 자신하고 있었다.

    “새로 바뀐 판사님은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2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낸 내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요?”

    산업스파이를 추적하는 국정원 요원들은 체포 뒤에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연구원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내 머릿속에 있는 기술을 내가 가지고 가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느냐”고 반박하는 일도 많다고 한다. R 씨는 어떤 경우일까? 1심 재판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산업스파이를 어떻게 추적하는 것일까? 국정원은 1993년부터 산업스파이 색출 및 보안지도 활동을 전개했는데, 산업기밀보호센터는 2003년에 세워졌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엔 대(對)산업스파이 관련 인력이 대폭 증원돼 국정원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아졌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걸 실감합니다.”

    기업체에서 산업보안 특강을 하는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A 요원의 말이다. 이른바 국정원 X파일 사건 이후 국정원이 특히 역량을 쏟아붓고 있는 분야가 바로 산업보안.

    정보기관의 활동 영역은 정보수집(Collection), 분석(Analysis), 공작(Covert Action), 방첩(Counter-intelligence) 등으로 나뉜다. 1961년 중앙정보부로 창설된 국정원은 40년 넘게 대북정보 자산을 축적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는데, 대북 업무에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활동이 모두 포함돼 있다. 국정원의 정보활동에서 북한보다 우선순위를 갖는 대상은 없었다.

    “요즘은 대북정보 못지않게 산업보안을 강조하는 분위기다.”(국정원 간부 B 씨)

    “직원들 비위 의심” 내부 제보로 수사

    적발 땐 ‘대물’ 처벌 땐 ‘피라미’인가
    A 요원도 대공수사에서 산업스파이 색출 쪽으로 ‘전공’을 바꿨는데, 국정원 관계자는 “국익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정보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국정원이 ‘본업(대북정보)’은 소홀히 하면서 ‘홍보 효과가 높은’ 부분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한다.

    국정원이 산업스파이를 쫓는 루트는 크게 세 가지다. 인지, 기획, 제보가 그것. 한창 벤처기업 열풍이 불 때는 테헤란로의 술집만 돌아도 산업스파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L사 기술로 뭘 한다고 하던대요”라는 식의 정보를 심심찮게 얻을 수 있었던 것.

    기획수사는 국정원 해외주재 요원들이 보내온 해외 산업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외국에서 특정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면 한국 기업에서 기술이 넘어간 건 아닌지 의심하고 관련된 국내 기업 목록을 뽑아 혐의가 없는 기업을 지워나가면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른바 ‘지우개 방식’).

    국정원이 산업스파이 색출 노하우를 확보하는 데는 과거의 기술 획득 경험도 일부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요일 밤 출국해 월요일 새벽 한국으로 돌아오는 연구원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데, 과거 국정원이 해외 과학자에게서 기술을 획득할 때 이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제보는 주로 직원들의 비위를 의심한 경영진 등 업체 내부에서 나온다. 특정 직원이 어느 곳으로 이직할 예정이고 어떤 대우를 보장받았는지, 회사 기밀을 빼돌린 흔적은 없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이직을 준비하는 직원은 대표적인 요주의 대상이다. 과학기술인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최성우 운영위원의 말이다.

    “국정원이 발표한 산업스파이 사건은 거의 모두 미수 사건이다. 게다가 외국으로 기술을 넘기려 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는 사례도 있다. 회사 자료를 단순히 복사해놓았거나 집에서 일을 하려고 USB에 저장해놓은 것만으로도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과정에선 산업스파이로 몰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구속되거나 기소된 사례가 적지 않다고 본다.”

    반도체 제조업체 C사의 W 연구원과 A사 Y 임원의 사례를 비교해보자.

    W 연구원은 C사가 개발한 반도체 핵심기술 및 반도체 공정기술과 관련한 자료를 회사 몰래 유출해 은닉하다가 국정원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그는 “외국 경쟁사에 취업할 때 활용하기 위해 기술을 팔아넘길 해외 업체를 물색 중”(국정원)이었다고 한다.

    A사의 Y 임원은 별도 회사까지 세워놓고 휴대전화 기술을 빼돌렸다. 시험용 휴대전화와 관련 핵심기술을 빼돌려 해외에 유출하려던 Y 임원의 행태를 회사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A사에 근무하면서 연구개발업체인 E사를 은밀히 운영했고, A사의 연구원 수명을 E사로 보내 일을 돕게 하기도 했다.

    별도 회사까지 세운 Y 임원은 많은 사람들이 파렴치범이라고 볼 듯싶다. 그러나 ‘실행하지 않은 범죄’로 검거된 A 씨의 경우 회사 자료를 개인적으로 보관한 일은 잘못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법원은 산업스파이 사건을 어떻게 판결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떠들썩했던 보도와는 달리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국정원은 3월 S사의 슬림형 휴대전화 기술을 카자흐스탄으로 빼돌리려던 일당을 검찰과의 공조수사로 적발했다고 발표했는데(예상 피해액 1조3000억원), S사 선임연구원이던 L 씨와 컨설팅업체 A사의 J 씨가 기소됐다. 7월 항소심에서 법원은 L 씨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3.5세대 CDMA’ 휴대전화의 핵심 기술을 빼돌리려고 한 혐의(예상 피해액 2조3000억원)로 3월 적발된 I 씨는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고, 해외 업체로 이직을 타진하면서 기술을 유출한 혐의(예상 피해액 4조원)로 기소된 H사 전 연구원 G 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법원에선 솜방망이 처벌

    2004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138명 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0명에 그친다. 7%가 조금 넘는 실형 선고율인 셈. 2005년 기술유출 혐의로 기소돼 1심 및 2심 선고가 난 54건 중 46건이 무죄 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물론 법원이 산업스파이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법원은 기술유출로 인한 이득액 산정에서 기술을 빼앗긴 업체의 예상 피해액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을 입수한 측이 절약한 개발비와 획득한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 이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뒤집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국정원과 검찰보다 영업비밀의 범위를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산업스파이 사건을 바라보는 검찰과 법원의 시각이 다소 다른 것 같다”면서 “기술유출 사건의 피의자들은 대부분 화이트칼라인 데다 초범이어서 죄를 뉘우치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처벌도 관대한 편인 듯하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IT, 휴대전화 등 국가 전략산업의 핵심기술은 기술사냥꾼들의 표적이 된 지 오래다. 훔쳐올 줄만 알았지 빼앗길 줄은 몰랐던 한국이 어느새 기술 선진국이 된 것이다. 국정원은 한국을 먹여살릴 기술을 지키는 데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의 유출을 막은 1998년의 ‘첫 작품’을 비롯해 눈부신 활약을 보여온 게 사실이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산업스파이 검거뿐 아니라 예방을 위한 산업보안 교육 및 컨설팅 활동도 벌이고 있는데, 대(對)국민 정보 서비스 기관으로 탈바꿈하려는 이런 움직임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북한 일변도에서 눈길을 돌려 정보 역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시스템을 갖게 된 것도 고무적인 일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예상 피해액이 실제 피해액보다 과장돼 소개되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수사가 마녀사냥 식이다” “엔지니어는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느냐”는 과학기술인들의 하소연에 국정원은 한번쯤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옛 국정원이 저지른 인권침해의 흔적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다.

    Tips

    기술유출 예상 피해액 산출 방법


    기업들은 기술유출의 예상 피해액을 산출할 때 주로 ‘수익접근법’을 사용한다. 이 접근법은 기술이 유출돼 상품개발로 이어져 출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매출감소 예상액을 시장점유율, 기술 수명, 기술 사이클 등을 고려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표된 산업스파이 사건의 경우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외의 산출방법으로는 상품의 시장가치로 피해액을 평가하는 ‘시장접근법’, 도난당한 기술을 확보하는 데 투입된 전체 비용으로 평가하는 ‘비용접근법’ 등이 있다. 기업이 ‘수익접근법’을 선호하는 것은 손실 규모가 가장 크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 사건이 늘면서 기업들은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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