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8

2006.08.15

징한 세상 잊고 ‘그림 속으로’ 손끝으로 藝 전통 이어

  •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입력2006-08-09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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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한 세상 잊고 ‘그림 속으로’ 손끝으로 藝 전통 이어
    고백컨대, 이런 삶은 살지 않으려 했다. 전남 강진 ‘촌놈’. 힘 쓰며 사는 인생이 어울릴 법하건만, ‘예(藝)’라 불리는 모든 것에 ‘될’ 소질을 보인 신동(神童)이었다고 한다. 여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아홉 살에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의 문하에 들었으며 열두 살 때부터 서편제 마지막 전수자인 오병수(심청가 예능보유자)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흥타령 가락조차 듣는 이의 소매를 젖게 했던 목청 좋았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내림해준 앞날이 너무 선명해서 딴 길을 가려 했다. 절대성(絶對性)을 동반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 반역(反逆)마저 아우르는 필연이랄까. 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인생이 두려웠다. 그땐 그랬다. 심장 터지도록 끓는 피를 두 주먹에 꽉 쥔 채 ‘먼 데’를 보았다. 열아홉 살이었다.

    “목회자로 평생 살라 안 했소. 자람서 내동 해온 것들이 말하자믄 신까리(神氣) 같은 거라. 긍께 춤이고 소리고 글이고 몬 하는 기 없었제. 어느 참에 허무해지더라고, 사내로 나서 뭔가 넘들이 알아줄 길을 가야겄다 싶기도 허고…. 어렸응께. 그래서 고등학교(강진고) 마치자마자 서울로 튀었제. 쩌―그, 워커힐 쪽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라.”

    ‘징했던’ 1981년 봄(5·18 민중항쟁), 선홍색으로 점철되던 현장에 그도 있었다. 진압군의 곤봉에 꽃 같은 고개를 떨구던 친구의 죽음도 반역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한 해 꿇고 들어간(82학번) 대학에서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투쟁위원장을 맡아야만 했다. 10대의 끝자락에 맞닥뜨린 인간의 극단은 처참했다. 최루가스보다 기억이 더 매워 눈물을 훔쳤다.

    고홍선(高洪先·45)은 그렇게 매운 눈물로 하느님의 종이 되어 20대 청춘을 어린 양들과 보냈다. 전도는 행복했다. 행복했으나 한구석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가슴이 아렸다. 갈증은 방황을 낳고 방황은 종당엔 그림이 될 터. 인사동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다. 무작정 헤매었다. 한다 하는 이들의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서울로 오기 전까지 놓지 않았던 붓이 다시금 절박하게 다가왔다.

    목회자의 길 걷다 진로 변경 … 당대 화가 그림 보며 연구 습작



    의재가 꾸리던 전남 광주의 연진회(미술학교, 현재 의재미술관)는 화가 고홍선을 있게 한 모태다. 강진에서 광주까지 오가길 10년. 피가 동하지 않았다면 못했을 일이다. 스승은 알려졌다시피 현대 동양화단 산수육대가(山水六大家) 중 한 분이다. 자라면서 의재 선생에게 보고 배운 것은 관념산수(觀念山水)고, 생동하는 필획이며, 초연한 기풍이다.

    “90년돈가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심사정의 지두화(指頭畵)를 처음 봤는데, 순간 ‘으―메, 이게 머당가’ 싶었지라. 특별전시라는디, 생전 듣도 보도 못헌 기 떠억 허니 불덩이맨치로 가심팍에 얹히더마는…. 자나 깨나 머리 꼭딩이서 그 생각뿐이었어라. 그랴서 오냐 내도 함 해볼란다, 그래 맘먹었지라.”

    징한 세상 잊고 ‘그림 속으로’ 손끝으로 藝 전통 이어

    그는 손톱과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그림을 그려왔다.(위)<br>악필서체와 지두화 그리기를 보여주고 있는 고홍선(아래).

    원래 지두화는 저잣거리의 그림이었다. 중국 청나라 시대의 화가 고기패가 효시라고도 하고, 당대 화가 장조가 먼저 그리기 시작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사료가 없어 설(說)로만 전해오는 동양화의 한 분야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최민식 분)이 손으로 그림을 그리던 장면을 기억하는지. 장승업처럼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화가들은 태반이 민초의 소생들이었다. 필묵을 사기 여의치 않았던 그들이 저자판에서 손을 붓 삼아 그려 생계를 잇던 그림이 바로 지두화였다. 일찍이 추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의 지두화를 조선의 으뜸으로 꼽고 자기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붓이 없으니 따지고 들 격식이 없고 얽매일 데 없으니 손 가는 모두가 선경(仙境)이요 그림 밭이라, 불가에서 말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가 이 경지지 싶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뭇없이 맥이 끊긴 지두화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그는 숱한 고서점을 뒤졌다.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연객 허필(烟客 許), 칠칠 최북(七七 崔北),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화은 홍대연(花隱 洪大淵)…. 지두화를 남긴 당대 화가들의 그림을 뜯어보고 연구하고 습작했다.

    지두화는 붓보다 필선이 유려하다. 섬세해서 애잔하다 싶다가도 일순 굵어지는 그림. 손톱으로 구사한 날카로운 실선들은 여백의 이완마저 붙들어놓는다. 인간의 손이 조홧속이라 열 필 붓에 비할까. 손가락 다섯 개의 손톱은 물론이고 손바닥, 손등까지 모두 쓰여 거칠 것 없는 고홍선의 그림. 다정(多情)이 사무치는 그림, 희로애락을 매만져주는 그림, 뻗치는 기운과 정갈한 여백의 간극에서 정화(淨化)를 얻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렇게 그림에게 되돌아왔다. 그림에 미치자 종교로 무장해 살았던 20대의 페르소나(외면적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자신의 모습, 인격의 가면)를 벗어던지던 순간이 그렇게 흔연할 수가 없었다. 그림이 쌓이는 두께만큼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미전법, 조발법 등 지두화에 발 들인 16년간 그가 개발한 화법도 수십 가지다. 지구상에서 지두화가는 딱 세 명, 중국에 두 명과 북한에 한 명이 있는데 조만간 한-중 지두화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믿을랑가 모르겄소. 달마도처럼 내 그림에서 기가 나옵디다. 저도 첨엔 몰랐어라. 한국 수맥협회 사람이 엘로드(수맥탐사봉)를 갖고 와서 실험한 거이 방송에 나간 적이 있제. 아, 4년 전에는 강도가 들어 전시할라꼬 준비해논 작품 50점을 맹칼읍시(맥없이) 털어가뿌렀지라. 내가 검도 4단에다가 국궁(國弓)을 해놔서 몸이 딴딴헌디 밤에 느작읍시(느닷없이) 뒷목을 때리들 안 허요. 기절했지 뭐. 그림 값이 솔찬이(상당히) 나간다 싶었능가 보제.”

    손톱이 닳고 지문이 문드러질 만큼 공력을 쏟은 그림이니 기가 막힐 법도 하다. 이따금 환자들이 찾아와 그림 앞에 한동안 앉았다가 가기도 한다고. 장풍 못지않은 지풍(指風)이랄까, 첫마디로 뱉었던 ‘신까리’가 손가락으로 뻗치는지 그가 써준 글씨를 호신 삼아 지니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서예가에 한학자로 명망 높았던 경수당 고기언(耕堂 高基焉)의 막내 손자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몸에 익힌 필법임에랴.

    ‘악필서체’ 창안자에 판소리 전수자 ‘팔방미인’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20대의 일탈은 오히려 작품 앞에서 쉬 식지 않는 열정이 되었다. 그림 외에 그가 하는 일들도 손을 꼽아야 할 지경이다. 두 자루에서 많게는 다섯 자루의 붓을 거머쥐고 휘호를 써내리는 ‘악필(握筆)서예’의 대가이자 주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자이며, 서각에도 일가견이 있어 한국서각협회 자문위원도 맡은 바 있다. 직접 운영하는 호남예술원(www.jidu.co.kr) 구석구석에 놓인 조각들도 그가 직접 제작한 작품들이다. 예술원에서 서예와 소리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징한 세상 잊고 ‘그림 속으로’ 손끝으로 藝 전통 이어

    고홍선은 서편제의 오병수와 중고제의 박동진에게 판소리를 배운 무형문화재 전수자다.

    악필법은 전주 출신 서예가 고(故) 석전 황욱(石田 黃旭)이 창안했지만, 노년에 수전증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한 서법으로 고홍선의 악필서체처럼 한 번에 몇 자루의 붓을 쥐고 쓰는 서법은 없었다. 따라서 추사체처럼 악필서체는 고홍선이 창안자다. 지두화에서 못다 푼 남성성을 일순에 내뿜는 힘, 한 획으로 뻗어 내린 글씨가 문외한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전날 밤 대구지역 예인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탓에 아직 술이 덜 깼다는 고홍선. 야생의 여린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먹통차로 그도, 기자도 해장을 했다. 차를 마시며 그가 틀어준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 어느 공연장, 악필서체를 실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켠에선 고수와 소리꾼이 판소리를 연주하고 있고 무대 중앙에서는 한산모시 두루마기에 갓을 쓴 그가 부채를 쥐고 춤을 춘다. 소리 한 대목이 꺾이는 어느 순간, 왼손으로 부채를 옮겨 잡자마자 화선지를 제압하는 일필휘지(一筆揮之). 부채를 쥐는 까닭은 서서 써야 할 경우 줄타기에서처럼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홍선이 이날 쓴 글씨는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연을 많이 하제. 일종의 전통 퍼포먼스라. 나는 글이고 그림이고 가락을 타고 신명이 올라야 작품이나온당께. 인사동 시절 종로구민회관에서 첫 퍼포먼스를 했지라. 퍼포먼스가 달래 퍼포먼슨가. 전통예술도 월매든지 감동을 줄 수 있당께. 이참에 대구지역 예인들과 힘 합쳐 소외된 이웃들 찾아가 무료공연 해볼라꼬 팀을 구성하고 있제.”

    전라도 출신인 고홍선이 대구를 삶의 기착지로 정한 건 아내(천경애·39) 때문이다. 처음 보았을 때 온통 배꽃 같은 웃음만 눈에 들어왔단다. 계명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아내를 만난 건 기독교청년회에서였다. 청년회 서예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참이었다. 세상 물정은 몰라도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닌 스물두 살 아가씨를 만나 2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애초 ‘손 타기’(^^) 전에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1991년도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막내로 자란 아내가 첫 아이(의정·중1)를 낳고 향수병이 심해져 처가가 있는 대구로 내려온 것.

    살면서 처가 덕 제대로 보고 있다며 사람 좋게 웃는 고홍선. 그가 작업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호남예술원을 장모님이 거저 내준 까닭이다. 양옥인 처갓집의 반지하를 통째로 사용할 뿐더러 담벼락에 삼강오륜을 비롯한 경구들을 한문으로 빼곡히 적어두거나 민족이 존경해야 할 이순신 장군 부조를 마당 안에 걸어두고 하루 한 차례 경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집 자체를 아예 작업장처럼 만들어도 장모님은 “예술가가 다 그렇지 뭐” 한마디면 끝이다. 남들처럼 돈 벌어 오라거나 가사분담하자며 긁어댈 바가지조차 잊어버린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는 7개월 전 둘째 아이 의진을 낳았다. 이태 전 작고한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옛다, 받아라”며 던져준, 선몽(先夢)으로 낳은 아이다.

    세상이 곧 화선지요, 인생사가 다 춤이고 소리라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한량 고홍선.

    “나는 돈이 안 붙게끄럼 타고난 팔자제. 긍께 서울 올라가믄 잘 좀 써주소. 글 보고 작품 좀 사러 오그로….”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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