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4

2006.07.18

‘축구의 세계화’, 월드컵은 죽었다!

유럽의 완력 축구 모든 팀 지배 밋밋한 경기 … 이변과 놀라운 작전보다 선수들 연기 판쳐

  • 뮌헨·프랑크푸르트·하노버 = 정윤수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6-07-14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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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축구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 이번 월드컵에서는 그 아름다운 희망이 일단 좌절됐다. 만약 축구가, 그리고 월드컵이 강자독식의 세계화시대에 그나마 한시름 덜고 싱싱한 창의력과 빛나는 상상력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제전이라면 이번 월드컵은 맥이 풀린 채 다소 밋밋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몇 차례의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가나, 히딩크 감독이 이끈 호주의 선전, 8강전에서 미끄러진 브라질의 오만, 그리고 한국의 조별리그 마지막 스위스전은 여러모로 복기할 만하다.

    특히 한국과 스위스의 G조 마지막 경기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서 22명이 흘린 땀방울이 의외의 요소에 의해 어떻게 희비의 극단으로 나뉘는지를 잘 보여줬다. 이 경기는 ‘심판의 오심’ 논란 역시 축구를 구성하는 명백한 요소라는 점을 준엄하게 확인시켜준 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결승전을 제외한 63경기 중에서 오직 한 경기를 명승부로 꼽아야 한다면 역시 4강전에서 맞붙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120분이다. 깊은 밤을 송두리째 바치고 아침 햇살이 거실로 밀려들 때까지 텔레비전 앞에 있었던 국내 팬들을 전율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들이 이 경기에 농축되어 있었다.

    오직 한 차선에서 안전운전 고집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안티팬’도 없다고 할 수 있는 브라질, 스타성이 강한 선수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노장과 신진의 합작품 프랑스, 그리고 ‘강한 체력과 슬기로운 마음’의 독일 등이 앞다퉈 우승 후보로 거론될 때 그 뒤에서 묵묵히, 그러나 단 하나의 ‘자책골’을 빼고는 무실점으로 4강에 오른 이탈리아. 그들은 이날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우승 후보임을 증명하기 위해 금세기 축구에서 가장 빛나는 ‘수비 축구’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 푸른 사나이들과 120분 동안 맞싸운 독일 선수들의 탄탄한 실력도 압권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이른바 ‘빗장 수비’로 독일의 거한들이 연거푸 퍼붓는 중·장거리 화포를 다 막아내면서 실은 그 ‘빗장 수비’가 대단히 세련된 공격의 스타트라인임을 증명했다. 이탈리아 축구는 그 황금의 수비라인에 최대한 ‘감정이입’을 한 상태에서, 다시 말해 ‘수비수’의 일원이라는 마음으로 관전할 때 그야말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더 짜릿하고 숨막히는 전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번 독일-이탈리아 4강전 역시 그와 같은 강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경기를 제외하면, 그러니까 50여 경기는 역대 월드컵 사상 가장 거칠고 밋밋한 시간들이었다. 모든 팀들이 안전운전을 고집했다. 오직 한 차선만으로 주행했고, 같은 차선 안에서 추월하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고 위협적으로 질주하는 양상이 대세였다. 섬세하게 차선을 바꾸면서 세련된 드라이빙을 보여준 팀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8강전이 시작될 때까지 예기치 않은 모험을 감행하는 감독을 찾아보기란 어려웠으며, 모든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창의적 플레이로 그라운드의 관습을 부정하는 선수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전통의 강호들은 건재했고, 그들은 조별 리그를 손쉽게 통과했으며, 8강전 이후부터는 ‘유러피언컵’처럼 그들끼리 결승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그 양상이란 흡사 30여 년 전의 ‘킥 앤 러시’가 다시 등장한 것처럼, 좌우 측면으로 파고든 다음 단조롭게 크로스를 올리고 이를 월등한 체격으로 장악하는 식이었다. 물론 유럽의 강호들은 단순히 체격 조건만 뛰어난 게 아니다. 조직력과 기술도 다른 대륙을 앞질러서 ‘힘과 힘’이 단순하게 맞부딪치는 혼전 양상 속에서도 경기 종료 10분을 남겨놓고 어김없이 골을 넣어 자신들의 목표치를 하나씩 거둬가긴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보여준 완력 축구는 그렇게 하여 그들 나름의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새로운 축구, 새로운 전술,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대한 팬들로서는 ‘투박하고 밋밋한’ 경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단의 프랑스, 베컴의 잉글랜드, 피구의 포르투갈, 라울의 스페인, 토티의 이탈리아, 발라크의 독일 등이 보여준 경기는 1998년 이후로 별로 달라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 특색 없는 비슷한 모습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위에 언급한 팀 내 간판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그 양옆에 거한들이 받쳐주고 맨 앞에 앙리, 토레스, 토니, 크라우치, 호날두 같은 젊은 기예들이 골을 노리는 전술은 결국 놀라운 이변이나 기립박수를 받을 만한 해트트릭,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현대 축구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하는 힌트를 조금도 주지 못했다.

    일종의 ‘축구의 세계화’ 과정에 의해 전 세계의 뛰어난 선수들이 대거 유럽으로 모이고 유럽의 명장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지도하고 있다. 이 과정이 10여 년 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이제는 ‘듣도 보도 못한’ 팀이나 선수가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서로가 서로를 무척 잘 아는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의외의 변수와 놀라운 작전보다는 안전한 ‘실리 축구’로 초반전을 다져나가는 것이 지배적인 양상이 되었다. 이것이 이번 월드컵에서 유럽의 완력 축구가 통한 까닭이다.

    이런 양상에서 선수들은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섰다기보다는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연기력을 선보이기 위해 나섰다 싶을 만큼 심판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연기를 보여주었다. 수십 대의 첨단 카메라는 심판의 실수뿐 아니라 선수들의 다양한 ‘연기’까지 모조리 잡아냈다. 물론 심각한 부상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선수도 있었지만, 얻어맞지도 않은 얼굴을 감싸쥐고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모습이 더 많았다.

    심지어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와 맞붙은 독일 선수들과 팬들은 아르헨티나의 주전 골키퍼가 독일 공격수의 무릎에 갈비뼈를 얻어맞고 쓰러져 있자,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며 재촉하는 최악의 매너를 보여줬다. 그라운드에 누워 있던 아르헨티나 팀 골키퍼는 결국 들것에 실려나갔고, 몸도 제대로 풀지 못한 후보 골키퍼가 부랴부랴 유니폼을 갈아입고 들어왔다. 그 와중에 독일 선수들, 특히 주장 발라크는 교체 골키퍼가 너무 늦게 들어온다며 주심에게 항의까지 했다.

    이 같은 일은 비단 독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팀의 경기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기 외적인 신경전과 연기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것이 경기 결과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자체가 오늘의 세계 축구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지 못하고 정체에 빠져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 국가들의 잔치로 막을 내린 이번 월드컵의 투박하고 밋밋한 축구가 다음 월드컵에도 그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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