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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붉은 6월! 그대들 있어 행복했노라

‘거미손’ 이운재 캡틴 투혼 빛났다

결정적 위기 수차례 선방 … 후배들 독려하며 언제나 솔선수범 ‘주장 역할 톡톡’

  • 쾰른·레버쿠젠·메트만=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거미손’ 이운재 캡틴 투혼 빛났다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메트만시 근교엔 지역 주민들이 주말농장 겸 별장으로 사용하는 작은 집 100여 채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독일인 폴커 기펜(44) 씨는 한국 축구대표팀 선수 가운데 ‘리’를 가장 좋아한다며, 프랑스전에서도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라고 해서 유럽 축구팬들에게 익숙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이영표를 말하나 했더니 ‘골키퍼 리’란다. 그는 “이운재가 매우 좋다”면서 미리 구입해놓은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꺼내왔다. 그러고는 기자에게 “사인을 받으려면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애타게 물었다.

“이운재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는 2002 한일월드컵 때 아내와 함께 한국까지 날아와 독일을 응원했다. 이운재의 플레이에 매료된 것은 한국과 독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라크의 결승골이 터졌을 때다.

당시 이운재는 오른쪽으로 날아온 공을 몸을 던져 간신히 막았으나, 다시 튀어나온 공을 발라크가 골문 오른쪽 공간으로 차넣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떻게 인간이 한쪽으로 쓰러지면서 공을 막은 뒤 순식간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릴 수 있느냐. 발라크의 슈팅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운재는 끝까지 공에 시선을 집중한 채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려고 애썼다. 그때 인간적으로 이운재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스위스전 출격으로 A매치 100게임 ‘센추리클럽 가입’

‘한국의 캡틴’ 이운재(33)는 시원시원하다. 최진철(35)에 이어 나이로는 두 번째 고참이지만, 팀 분위기를 이끌고 선수들을 독려하는 데는 언제나 솔선수범한다.

6월4일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패한 뒤 선수들을 그라운드에 집합시킨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운재는 인터뷰 때도 적극적이다. 그의 말은 다소 투박하지만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6월19일 프랑스전을 앞두고 “프랑스를 박살내고 싶다”고 말했다. ‘박살’. 때려부순다는 의미의 이 섬뜩한 단어를 그는 한국 축구를 무시하는 유럽의 거만함에 일침을 놓겠다는 뜻으로 썼다.

실제로 그는 이날 “손이 아니면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자신의 각오처럼 프랑스의 결정적인 슈팅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

전반 9분 티에리 앙리에게 노마크 찬스를 내준 일은 불가항력. 골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되긴 했지만, 전반 32분 파트리크 비에이라의 헤딩슛을 쳐낸 것은 자칫하면 그대로 끝날 뻔한 승부의 추를 되돌린 값진 선방이었다. 박지성의 동점골이 터지고 난 직후인 후반 40분 지네딘 지단이 만들어준 일대일 상황에서 앙리가 찬 회심의 킥을 막은 것은 수문장이 아니라 수호신의 모습이었다. 앙리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프랑스전을 마친 이운재의 표정엔 여유가 넘치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경기를 앞두고 보인 도발적인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데간데없었다.

“나 혼자만 잘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모든 선수들이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해줬기 때문이며, 나는 한두 개 좋은 방어를 했을 뿐이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운재를 거론할 때면 늘 ‘캡틴(주장)’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이운재는 수사도 대표팀 주장답다.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이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운재는 주장으로서 훈련이나 경기 중에 수비라인을 진두지휘한다. 그는 경기 중 공을 잡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훈련장에서도 그의 떠나갈 듯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운재의 압도적 목소리엔 강한 투지가, 결연한 표정에는 절실함이 담겨 있다. 그의 이런 에너지는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라운드에선 캡틴, 밖에선 군기반장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운재가 이끈 한국의 ‘팀 케미스트리’가 이번 월드컵에서 선전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선수들에게 다가가며 공격수들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그의 경험이 이번에도 빛을 발한 것이다.

이운재는 6월24일 스위스전에 출격하면서 국내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 선수 모임)’에 가입했다. 1994년 3월5일 미국전으로 A매치에 데뷔한 지 어느덧 12년이 흐른 것이다. 센추리클럽 가입은 한국 선수로는 차범근(121경기), 홍명보(135경기), 황선홍(103경기), 유상철(122경기), 김태영(101경기)에 이어 6번째이며 골키퍼로는 최초다.

이운재는 2002년 김병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주전 골키퍼로 낙점받아 4강신화의 주춧돌이 된 바 있다. 7경기에서 6실점. 터키와의 3·4위전 3실점을 제외하면, 3실점밖에 되지 않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특히 스페인과의 준준결승전 승부차기 승리는 이운재라는 이름을 한국 축구 역사에 또렷하게 새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운재는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몸무게’. 2002년 82kg이던 몸무게가 90kg을 훌쩍 넘어선 것. 몸무게가 불면서 몸놀림이 둔해졌다는 지적과 함께 ‘김병지 대안론’이 고개를 들었다. 운동을 게을리해 뚱뚱해졌다는 비아냥거림도 들려왔다.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 … 한때 체중 불어 곤욕 치르기도

이운재는 기자들에게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며 체중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때는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단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이운재와의 미팅에서 “체중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체중 문제에 대해 언론에서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눈치 볼 필요 없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을 빼라”는 따뜻한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5월 파주에서 열린 대표팀 체력훈련에서 이운재는 결국 늘어난 체중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 25분 만에 지쳐 훈련을 중단한 것. 이운재에게 비판적인 기자들은 그를 ‘25분짜리 골키퍼’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운재는 짧은 기간에 체력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는 최후방의 스위퍼 역할까지 해야 하며, 상대팀의 최전방 공격수와 맞서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슈팅을 예상하며 슛의 각도를 좁히는 등 다양한 일을 해야 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러한 역할을 만족스럽게 수행한 이운재는 ‘한국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골키퍼’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간동아 2006.07.04 542호 (p26~27)

쾰른·레버쿠젠·메트만=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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