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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신라’ 비밀 푸는 국보급 내용 담겨 … 13년의 위작 시비 속 재평가 작업 활발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올해 초 6~7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역사서 ‘오국사기’를 펴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수서’ ‘당서’ ‘자치통감’과 ‘일본서기’ 등 중국·일본 사료까지 꼼꼼히 분석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료가 ‘화랑세기’다. 끊임없이 위작설에 시달려온 ‘화랑세기’에 대해 이덕일씨는 “대부분 사실로 믿는다”고 단언했다. 드디어 ‘화랑세기’ 필사본을 둘러싼 13년의 지루한 진위 논쟁이 마무리되는 것일까.

1989년 2월16일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었다. 32쪽짜리 이 필사본이 만약 ‘삼국사기’에 언급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다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이른 기록이다. 더욱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인이 쓴 삼국시대 이야기라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 이야기였으니 한국 고대사학계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남당 박창화(1889~1962)가 1933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 촉탁직으로 일할 때 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료는 비록 필사본이지만 내용 면에서 ‘국보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문화재감정위원 조성용씨와 정중환 전 동아대 교수의 감정 아래 공개된 이 필사본은 곧 위작 논쟁에 휘말렸다.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들이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며 한걸음 물러났다. 이것이 ‘화랑세기’ 논쟁 1라운드다.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2라운드는 6년 뒤인 1995년 역사학회 월례 발표회장에서 벌어졌다. 신라골품제와 화랑도를 연구하던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를 면밀히 검토한 후 ‘화랑세기 연구서설-서사로서의 신빙성 확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위작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때 서울대 노태돈 교수(사학)가 “89년 발견된 ‘화랑세기’는 발췌본이고 원래 박창화의 필사본은 따로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새로운 필사본은 책 제목과 서문 등 앞쪽 일부가 훼손돼 없어졌지만 162쪽 분량으로 32쪽의 발췌본에 비해 훨씬 자세했다. 노교수는 두 달 뒤 필사본 역시 가짜라는 내용의 논문을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완역본을 출간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문 원문에 한글 역주해를 단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소나무)의 발간으로 좀더 많은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1년 뒤 아예 대중역사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를 펴냄으로써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쪽으로 대세를 몰아갔다. ‘화랑세기’ 완역본 출간 때만 해도 이종욱 교수는 서문에서 “화랑세기는 위작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실제 위작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는 “성경은 원본이 없다. 화랑세기도 원본은 없다”는 말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2000년대 들어 진위 논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교수가 적극적으로 가짜가 아니라는 근거를 내놓은 반면, 위작론 쪽에서는 학술적 반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화랑세기’ 필사본 연구가 확산되면서 진짜임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고, 또 진본임을 전제로 신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들도 출간되고 있다.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 1편을 통해 진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국문학계에서는 99년 성균관대 김학성 교수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발견과 향가연구의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노태돈 교수의 주장을 뒤집었다. 노교수는 ‘화랑세기’에 실려 있는 향가가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했지만 김교수는 1942년 양주동에 와서야 향가 14수에 대한 완전 해독이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시기적으로도 박창화의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최근 ‘화랑세기’ 관련 논문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말 성균관대 이영훈 교수(경제학)가 발표한 ‘화랑세기에서 노(奴)와 비(婢)’다. 이교수는 98년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국시대의 노비 개념과 후대 천민이 된 노비의 개념이 다르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종욱 교수의 ‘화랑세기’ 역주해본에 등장하는 ‘노’와 ‘비’(각 10회)를 분석한 결과 사실이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의 노와 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종과 계집종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신하의 관계였다.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을 쓴 서강대 박물관의 조범환 학예연구원은 우리 역사에서 왜 신라시대에만 3명의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존재했는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랑세기’에 빚을 졌다. 그는 “화랑세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신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신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대중역사서나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를 인용하는 경우는 훨씬 많다. 이덕일씨는 ‘오국사기’ 이전에도 이희근씨와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어느 부분이 진짜인가 진지하게 검토해야지, 연구자의 지식 외의 것이 담겨 있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사료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문화재관리학)는 지난해 펴낸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이라는 책에서 화랑도의 기원을 설명할 때 ‘화랑세기’를 인용했다. 그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돼 있는 순국지상주의의 무사정신으로 충만한 화랑들과 달리 ‘화랑세기’가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역사소설로는 정순태의 ‘김유신’, 이문영의 단편소설 ‘다정’, 김지수의 ‘문명왕후 김문희’ 등이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씌어졌다. 김지수씨는 “빈약한 사료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종욱 교수의 역주해본 ‘화랑세기’가 가장 큰 도움이 됐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복잡한 혈연관계와 인간관계를 짚어가며 소설적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21세기 ‘화랑세기’ 논쟁은 확실히 가짜냐 진짜냐의 평행선에서 벗어나고 있다.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듯이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도 없다.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한 국문학자는 이제 진위 논쟁이 아니라 ‘화랑세기’ 연구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학자의 눈으로 보면 필사본은 분명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 혹은 발췌본만 놓고 진위를 다툴 게 아니라 필사자 박창화가 남긴 수많은 저술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가 1962년 작성한 목록에는 86권의 책이 있는데 대부분 창작물). 거기에는 진짜라는 쪽에 유리한 증거도 혹은 가짜라는 쪽에 유리한 증거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고구려 미천왕의 전기인 ‘을불대왕전’처럼 역사소설로서 완벽한 작품도 있다. 그것이 모두 세상에 공개된 후 누구나 ‘화랑세기’를 자유롭게 연구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주간동아 333호 (p64~65)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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