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꾸준히 해외 인력을 채용해 온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지난달 사장단 워크숍에서 국적 불문의 우수인력 채용과 석·박사 인력의 매년 1000명 증원을 공언하면서 해외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 삼성 계열사 사장들은 특히 이회장이 인재 확보에 사장단이 직접 뛸 것을 주문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계열사의 한 임원은 “해외 출장 시간이라도 쪼개서 우리가 채용할 만한 현지 우수인력이 있는지 살펴봐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출장 시간 쪼개서 살펴야 할 형편”
디지털 TV와 PDP, TFT-LCD 등 첨단 디스플레이 제품을 승부사업으로 내세운 LG전자 역시 지난 5월 미국 현지 면접을 통해 석·박사급 인력 50여명을 선발했다. 이중 절반 정도는 미 MBA 출신으로 관리, 마케팅 분야에 배치되며 나머지는 개발 인력들. LG전자에서 그룹 차원의 해외 인력 채용과는 별도로 독자적 면접을 통해 해외 인력을 유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영화 과정을 밟고 있는 KT는 공기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해외 우수인력 채용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경우. KT는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의 현지 면접을 거쳐 7월 중순까지 20명 안팎의 해외 우수인력을 선발한다는 방침으로 막바지 인선작업을 벌이고 있다. 98년 이후 4년 만에 실시한 이번 KT의 해외 인력 공모에는 약 570명의 지원자가 몰려 무려 30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후문이다. KT 관계자는 “민영화 이후 KT가 초우량기업으로 국제시장에서 평가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반색했다.
물론 IMF 이전에도 해외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타나는 기업들의 움직임은 당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해외 인력 채용기준이 주로 대상자의 경력이나 학위를 보고 선발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의 채용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으로서는 해외 인력의 몸값이 높아진 만큼 철저하게 ‘투자 회수율’을 생각지 않을 수 없기 때문. LG경제연구원 최병권 연구원은 “최근 대기업들은 반도체 설계나 컴퓨터 엔지니어링 등 특정 분야의 능력이 어느 정도 입증된 인재를 뽑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채용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주로 개인적 해외 인맥을 통한 스카우트 방식이 선호됐다면 최근 들어서는 해외 현지에서의 대규모 면접을 통한 채용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해외에 법인을 갖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들의 경우 현지 업무의 상당부분을 우수 인재 확보에 쓰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현지법인의 한 관계자는 “실리콘밸리 내에 있는 스탠포드대학을 포함해 주변 유수 대학에서 열리는 각종 세미나에 참석해 우수 논문을 확보하고 발표자들을 접촉하는 것이 어느새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고 전했다.

고급 인력들에 대한 구인구직 활동을 중개하는 서치 펌(search firm) 업계도 기업들의 해외 인재 채용 바람을 반긴다. KK컨설팅 김국길 사장은 “그동안 해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우수 인력들은 국내에서 자리잡을 만한 기회가 부족해 미국 현지기업에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서 “해외 인재를 100명 채용해서 히딩크 같은 인재가 한 명만 나온다고 해도 대성공인 만큼 ‘파란 눈도 괜찮다’는 기업들의 인식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기존 사원들의 몇 배나 되는 연봉을 주고 데려온 해외파 인력들의 ‘실적’이 아직 명확하게 검증되지 않은 만큼 다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결국은 이들에게 어떤 동기 부여를 통해 기업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셈.
이질적 기업문화·내부 박탈감 고민도
IBM에 20년간 근무하다 3년 전 국내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삼성전자 AMLCD 사업부 석준형 전무는 “신인들의 경우 경제적 대가보다 자신의 경력관리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만큼 이들이 열정을 쏟아가며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석전무는 “다소 이기적 특성을 갖고 있는 젊은 인재들에게 이러한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최근의 해외 인력 유치 열풍은 유행에 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LG경제연구원 최병권 연구원도 “지금과 같은 인재확보 전쟁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으므로 내부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에도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기업들의 해외 인재 확보 전쟁에서 부상병이 속출한다면 ‘전투’는 치를 수 있을지언정 ‘전쟁’에서 이기기는 힘들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