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보고 길을 찾다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겪곤 한다. 지도상의 포장도로가 실제로는 비포장도로인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사실 그건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길이란 길은 죄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요즘엔 어쩌다 만나는 흙길이 오히려 반갑다. 정말 황당한 것은 지도에 노번(路番)까지 버젓이 표기돼 있는 길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경우다. 이번에 찾아간 20번 국도의 포항~건천 구간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여러 지도책뿐만 아니라 국도를 관리하는 지방국토관리청 홈페이지의 일반국도 현황, 그리고 한국도로공사의 전국 지도에도 이 국도는 경북 포항에서 경남 산청 사이를 잇는 도로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포항 어디에서도 20번 국도의 시점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이 국도의 표지판을 처음 만난 곳은 지도상의 시점으로부터 40여km 떨어진 경주시 건천읍 삼거리였다.
20번 국도의 ‘진짜’ 시점인 건천 삼거리에서 조금만 가면 단석산(827m) 자락의 당고개를 넘게 된다. 경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단석산은 산세가 제법 험하면서도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그래서 옛 신라의 화랑들이 찾아와 심신을 수련했던 곳이라고 한다. 단석산(丹石山)이라는 이름도 김유신 장군이 17세의 화랑 시절에 신술(神術)로써 이 산의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잘랐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산중의 상인암이라는 바위에는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과 함께 신라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고개를 넘어온 20번 국도는 불고기집이 밀집한 경주시 산내면 소재지(의곡리)를 거쳐 곧장 청도군으로 넘어간다. 청도 땅에 들어서자마자 운문호의 호반길이 시작된다. 오랜 가뭄 탓에 저수량은 넉넉지 않아도 우뚝한 영남알프스의 산봉들에 둘러싸인 호수가 퍽 아름답다.
예나 지금이나 화양읍은 청도군의 행정 중심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빙고(보물 제323호)와 옛 청도읍성, 그리고 청도 관아의 객사 건물도 모두 화양읍에 있다.
화양읍내에서 시오리쯤 더 가면 ‘청도 소싸움 축제’의 주 무대인 서원천 둔치다. 마침 소싸움 축제가 한창이었다. 평일인 데다 입장료(어른 4000원)와 주차비(1대 2000원)를 내고 관람하는 유료 축제인데도 주차장과 소싸움 경기장의 관람석은 만원이었다.
청도 땅에서 비티재와 방골재를 잇따라 넘어서면 창녕군이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곳이라 산지가 적고 들녘은 넓다. 그래서인지 때 이른 봄기운이 완연하다. 민가 뒤란의 매화나무와 살구나무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고, 20번 국도변의 낮은 산등성이에 오롱조롱 솟아오른 고분들의 잔디에도 춘색(春色)이 짙다.
낙동강 위의 적포교를 건넘으로써 창녕군에서 벗어난 20번 국도는 잠시 합천 땅을 달리다가 곧 의령군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종점인 산청군 사이에는 왕복 4차선 구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왕복 4차선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의령읍 우회도로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승승장구했던 홍의장군 곽재우의 사당이 있다. 그리고 의령읍내를 관통하는 20번 국도변에는 ‘신라통(新羅統·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지층의 하나) 중 우흔(雨痕)’이라는 난해한 이름이 붙은 자연사 유적지가 있다. 쉽게 말해 ‘백악기의 빗방울 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196호)이다.
의령읍을 벗어난 20번 국도 주변의 산세는 눈에 띄게 높고 두꺼워진다. 산청 땅에 들어서면 숫제 첩첩산중이다. 높고도 큰 지리산이 멀지 않은 탓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의 국도변에 우뚝 솟은 암벽에는 특이한 마애불이 조각돼 있다. 사람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당대를 대표할 정도로 빼어난 조각품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크기의 불상 29구가 작은 암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이 퍽 이채롭다.
산청군 생비량면과 신안면을 거쳐 단성교를 건너면 지리산 동부지역의 관문인 단성면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목화시배지(木花始培地, 사적 제108호)이자 조선 말 진주민란의 도화선이 된 단성봉기(丹城蜂起)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목화시배지에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하나 넘으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한 남사마을에 다다른다. 이곳의 고택 중에는 20세기 초에 부(富)와 위세를 보이려고 지은 것이 많다고 한다.
남사리를 뒤로하고 지리산 쪽으로 40여리쯤 들어가면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다. 옛날에 덕산이라 불리며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였던 마을이다. 또한 조선시대 대표적 도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의 은거지로도 유명하다. 사리와 그 이웃 마을인 원리에는 지금도 산천재(山天齋), 남명 묘소,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등 남명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남아 있다. 그중 남명의 처소였던 산천재에 들어서니 그윽한 매향(梅香)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남명이 살아생전에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흘리는 향기다.
시천 삼거리에서 20번 국도의 종점인 중산리까지는 약 14km. 길 굽이를 돌아설 때마다 지리산 천왕봉이 명멸(明滅)을 거듭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대숲 위로 불끈 치솟은 천왕봉은 한달음이면 닿을 듯이 가깝게 보인다. 하지만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가장 가까운 출발점인 중산리에서도 꼬박 4시간 넘게 걸어야 올라설 수 있다. 그러니 지리산은 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명산(名山)이자 영산(靈山)이다.
여러 지도책뿐만 아니라 국도를 관리하는 지방국토관리청 홈페이지의 일반국도 현황, 그리고 한국도로공사의 전국 지도에도 이 국도는 경북 포항에서 경남 산청 사이를 잇는 도로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포항 어디에서도 20번 국도의 시점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이 국도의 표지판을 처음 만난 곳은 지도상의 시점으로부터 40여km 떨어진 경주시 건천읍 삼거리였다.
20번 국도의 ‘진짜’ 시점인 건천 삼거리에서 조금만 가면 단석산(827m) 자락의 당고개를 넘게 된다. 경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단석산은 산세가 제법 험하면서도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그래서 옛 신라의 화랑들이 찾아와 심신을 수련했던 곳이라고 한다. 단석산(丹石山)이라는 이름도 김유신 장군이 17세의 화랑 시절에 신술(神術)로써 이 산의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잘랐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산중의 상인암이라는 바위에는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과 함께 신라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고개를 넘어온 20번 국도는 불고기집이 밀집한 경주시 산내면 소재지(의곡리)를 거쳐 곧장 청도군으로 넘어간다. 청도 땅에 들어서자마자 운문호의 호반길이 시작된다. 오랜 가뭄 탓에 저수량은 넉넉지 않아도 우뚝한 영남알프스의 산봉들에 둘러싸인 호수가 퍽 아름답다.
예나 지금이나 화양읍은 청도군의 행정 중심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빙고(보물 제323호)와 옛 청도읍성, 그리고 청도 관아의 객사 건물도 모두 화양읍에 있다.
화양읍내에서 시오리쯤 더 가면 ‘청도 소싸움 축제’의 주 무대인 서원천 둔치다. 마침 소싸움 축제가 한창이었다. 평일인 데다 입장료(어른 4000원)와 주차비(1대 2000원)를 내고 관람하는 유료 축제인데도 주차장과 소싸움 경기장의 관람석은 만원이었다.
청도 땅에서 비티재와 방골재를 잇따라 넘어서면 창녕군이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곳이라 산지가 적고 들녘은 넓다. 그래서인지 때 이른 봄기운이 완연하다. 민가 뒤란의 매화나무와 살구나무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고, 20번 국도변의 낮은 산등성이에 오롱조롱 솟아오른 고분들의 잔디에도 춘색(春色)이 짙다.
낙동강 위의 적포교를 건넘으로써 창녕군에서 벗어난 20번 국도는 잠시 합천 땅을 달리다가 곧 의령군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종점인 산청군 사이에는 왕복 4차선 구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왕복 4차선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의령읍 우회도로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승승장구했던 홍의장군 곽재우의 사당이 있다. 그리고 의령읍내를 관통하는 20번 국도변에는 ‘신라통(新羅統·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지층의 하나) 중 우흔(雨痕)’이라는 난해한 이름이 붙은 자연사 유적지가 있다. 쉽게 말해 ‘백악기의 빗방울 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196호)이다.
의령읍을 벗어난 20번 국도 주변의 산세는 눈에 띄게 높고 두꺼워진다. 산청 땅에 들어서면 숫제 첩첩산중이다. 높고도 큰 지리산이 멀지 않은 탓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의 국도변에 우뚝 솟은 암벽에는 특이한 마애불이 조각돼 있다. 사람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당대를 대표할 정도로 빼어난 조각품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크기의 불상 29구가 작은 암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이 퍽 이채롭다.
산청군 생비량면과 신안면을 거쳐 단성교를 건너면 지리산 동부지역의 관문인 단성면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목화시배지(木花始培地, 사적 제108호)이자 조선 말 진주민란의 도화선이 된 단성봉기(丹城蜂起)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목화시배지에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하나 넘으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한 남사마을에 다다른다. 이곳의 고택 중에는 20세기 초에 부(富)와 위세를 보이려고 지은 것이 많다고 한다.
남사리를 뒤로하고 지리산 쪽으로 40여리쯤 들어가면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다. 옛날에 덕산이라 불리며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였던 마을이다. 또한 조선시대 대표적 도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의 은거지로도 유명하다. 사리와 그 이웃 마을인 원리에는 지금도 산천재(山天齋), 남명 묘소,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등 남명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남아 있다. 그중 남명의 처소였던 산천재에 들어서니 그윽한 매향(梅香)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남명이 살아생전에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흘리는 향기다.
시천 삼거리에서 20번 국도의 종점인 중산리까지는 약 14km. 길 굽이를 돌아설 때마다 지리산 천왕봉이 명멸(明滅)을 거듭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대숲 위로 불끈 치솟은 천왕봉은 한달음이면 닿을 듯이 가깝게 보인다. 하지만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가장 가까운 출발점인 중산리에서도 꼬박 4시간 넘게 걸어야 올라설 수 있다. 그러니 지리산은 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명산(名山)이자 영산(靈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