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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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 뚫고 핀 ‘자주빛 생명’

나지막한 오름엔 “지각생 들꽃” 만발… 동백·수선화도 우아한 자태 뽐내

  • 입력2007-05-11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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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바람 뚫고 핀 ‘자주빛 생명’
    요맘때쯤의 초겨울에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이나 내륙지역에서는 꽃구경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일년 열두 달 중에서도 꽃이 가장 드문 때가 바로 이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울날의 기온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제주도에서는 여전히 싱그러운 가을꽃과 때 이른 동백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남제주군 대정읍 일대의 나지막한 오름(寄生火山)이나 들녘에서는 일년 내내 갖가지의 들꽃들이 피고 진다.

    이맘때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을꽃으로는 들국화의 일종인 눈쑥부쟁이가 가장 흔하다. 이 눈쑥부쟁이는 주로 한라산과 오름 중턱의 양지바른 풀숲에서 자라는데, 사촌뻘인 쑥부쟁이 개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섬쑥부쟁이 등과는 달리 키가 15~25㎝에 불과하다. 바람 많은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작은 키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정읍 모슬포항의 동남쪽 바닷가에 우뚝한 송악산(104m)에 오르면 눈쑥부쟁이의 자줏빛 꽃을 볼 수 있다. 거대한 이중분화구로 이루어진 송악산 정상은 가파도와 마라도, 산방산과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시야가 사방으로 툭 터진 곳이라 늘 거센 바닷바람이 끊임없이 몰아친다. 사람도 몸을 가누기 힘겨울 만큼 바람이 세찬 곳인데도 풀섶 곳곳에는 눈쑥부쟁이가 소담스럽게 꽃을 피우고 있다. 하나같이 땅바닥에 누운 듯 키가 작은 덕택에 바람이 모질게 불어도 줄기가 부러지거나 꽃잎을 떨구는 법이 없다. 눈쑥부쟁이는 이처럼 키도 작고 드문드문 자라기 때문에 무리지어 꽃이 핀 장관은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이 사뭇 감동적이다.

    동백은 제주도의 어느 곳에나 흔하게 자라는 상록수다. 그러나 개화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2월 초순에는 서귀포시와 남제주군 일대의 바닷가 마을에서나 때 이른 동백꽃이 간간이 눈에 띈다. 송악산 인근의 추사적거지(秋史謫居地)에서도 동백꽃을 감상할 수 있다.



    대정읍 보성리에 위치한 추사적거지는 제주도의 여느 명승지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찬바람 부는 겨울철이면 을씨년스럽고도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비좁은 마당 한구석에서 정념(情念)을 품은 듯한 붉은 꽃송이를 속절없이 떨구는 동백이 더욱 반갑고도 아리땁다.

    추사의 자취가 서린 대정읍의 들녘과 밭둑에는 유난히 수선화가 많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소한 대한 의 한절(寒節)을 넘기고 입춘에 접어들 즈음이면 야생 수선화의 정결하고도 우아한 꽃빛을 감상할 수 있다.

    겨울바람 뚫고 핀 ‘자주빛 생명’
    추사는 수선화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각별했다. 유배 당시에 권돈인이라는 벗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수선화는 정말 천하의 구경거리다. 중국의 강남은 어떠한지 알 수 없지만, 여기는 방방곡곡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수선화 없는 데가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자연의 시련 속에서도 향기 그윽한 꽃을 피우는 수선화와 힘겨운 유배생활 중에도 부단히 탁마(琢磨)하는 자신을 동일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송악산 산방산 용머리해안 모슬포항 추사적거지 형제섬 화순해수욕장 등의 절경과 명소가 즐비한 제주도 서남부지역에는 제주사람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역사유적도 여럿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연합군의 대반격으로 전세가 점점 불리해진 일본군은 본토를 사수하는 최후의 방어진지로 활용하기 위해 제주도에 7만명의 대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사시설물을 구축하는 작업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송악산 북쪽의 상모리 들녘에 구축된 알뜨르비행장인데, 당시 오무라 해군항공대가 주둔하던 이 비행장에는 20여개의 격납고가 설치됐다. 현재 밭으로 변한 이 비행장터에는 당시의 격납고가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일제는 또한 송악산 기슭과 해안절벽에 어뢰정기지와 방공호로 활용하기 위해 수많은 인공동굴을 뚫었다. 지금껏 남아 있는 이 동굴들은 언뜻 자연동굴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굴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오르내리거나 군사물자를 비축하기에 편리하도록 곳곳마다 계단과 광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밖에 알뜨르비행장 인근의 섯알오름에는 미군의 공습을 대비한 고사포진지가 설치되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제주 사람들의 고난도 모두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동족끼리의 살육전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서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알뜨르비행장 부근의 섯알오름은 바로 그런 원혼이 떠도는 역사적 현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豫備檢束)으로 검거된 뒤 섯알오름에서 처형된 사람은 모두 193명이었다 .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에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모두 수습됐지만 같은 날 새벽 5시에 처형된 132명의 시신은 당국에서 인도를 거부하는 바람에 사건 발생 후 6년8개월만인 1957년 4월에야 비로소 수습되었다. 그러나 유골만 남은데다 시신이 서로 뒤엉켜 있어 신원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유족들은 할 수 없이 유골을 적당히 나누어 132개의 무덤을 만든 다음 유족들 모두가 희생자 132명을 한 조상으로 모실 것을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안덕면 사계리의 들녘 한가운데에 ‘백조일손지묘’라는 무덤이 생겨났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욱 처연하게 느껴지는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집 이맛

    해물과 된장의 만남 ‘해물뚝배기’ 드세요


    겨울바람 뚫고 핀 ‘자주빛 생명’
    제주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어항인 모슬포항은 늘 제주 뱃사람들의 억척스런 생활력과 활기가 넘칠 뿐만 아니라 갖가지의 해산물도 풍부하게 쏟아져 나온다. 모슬포항 초입의 삼거리에 자리잡은지 20년쯤 된 해녀식당(064-794-3597)의 가장 든든한 밑천도 바로 모슬포항의 풍부한 해산물이다. 이 집의 메뉴만 보더라도 모슬포항 같은 어항을 지척에 두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는 음식들로 채워져 있다. 생선회 자리회 자리물회 회덮밥 성게국백반 해물뚝배기… 등등.

    모슬포항 인근에서는 소문난 맛집이라 무엇을 시키든지간에 본전 생각날 일은 없지만, 이맘때쯤의 초겨울에는 무엇보다 해물뚝배기가 제격이다. 이 음식은 제주도의 어디에서나 쉽게 맛볼 수 있지만 제대로 맛을 내는 집은 별로 흔치 않다. 이 집의 해물뚝배기는 성게 홍합 새우 굴 소라 쏙 맛 등의 해물에서 우러난 국물과 집에서 손수 담근 된장으로 끓인 국물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아주 시원하고도 담백하다. 방어 도미 쥐치 병어 등의 횟감이 듬뿍 들어간 회덮밥도 맛이 일품이다. 해물뚝배기와 성게국백반은 5000원이고, 회덮밥은 6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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