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3

..

간첩은 포경수술 안한다…왜?

공작원들엔 벤츠에 장 . 차관급 대우…간첩 파견은 노동당서 주도

  • 입력2007-05-02 11: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간첩은 포경수술 안한다…왜?
    간첩사건이 날 때마다 듣는 이름이 ‘합신조’다. 합신조는 국정원-기무사-정보사-경찰청의 대공 요원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초동 감식을 어떻게 해내는지에 따라 간첩사건의 해결 속도가 달라진다. 98년 7월12일 강원도 동해시 앞바다에서 비닐에 싼 권총을 휴대한 잠수복 차림의 남자 시체와, 이 남자가 타고온 것으로 추정되는 추진기(일명 스쿠터)가 발견됐다.

    간첩 냄새가 “폴폴” 나는 사건인 만큼 즉각 합신조가 출동했다. 위-변조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간첩은 있어도, 간첩 신분증을 갖고 있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간첩 몸에는 ‘내가 바로 간첩이오’를 외치는 특별한 ‘표지’(標識)가 있다. 간첩으로 추정되는 장년 남자의 ‘거시기’에 ‘고래’를 잡은 흔적이 없다면, 그는 십중팔구 간첩이다. 이 시체 역시 포경(包莖) 상태였다. 더구나 권총과 무전기를 소지하고 있으니 틀림없는 간첩으로 판단하고 합신조는 곧바로 잔당 색출작전 돌입을 결정했다.

    간첩사건은 1년에 대여섯번씩 터져나온다. 그러다 보니 간첩 관련 기사는 읽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간첩은 왜 포경수술을 하지 않을까”라고 물으면, 백명 중 아흔아홉명은 말문이 막혀 버린다. 다 아는 것 같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북한 간첩세계다. ‘포경 수술’을 시발로, 북한 간첩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도해 본다.

    간첩으로 침투했다 귀순한 사람들은 포경 문제에 대해 아주 간단히 대답한다. “북한에서는 조선시대처럼 포경수술을 하는 문화가 아예 생긴 적이 없다. 간첩을 비롯한 북한 남성들은 포경수술 자체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북한 간첩사건에는 포경수술이 보편화된 한국과 포경수술 자체를 모르는 북한간의 ‘문화 충돌’ 현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적잖은 국민이 북한 간첩조직은 한국 국정원과 비슷한 북한 정보기관에서 관리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 간첩은 밥 먹듯이 살인할 수 있는 포악한 인물일 것으로 상상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의 국정원과 비슷한 북한 조직은 ‘국가보위부’다. 그러나 국가보위부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간첩을 색출하는 ‘방첩’ 업무는 수행해도, 한국으로 간첩을 침투시키는 일은 담당하지 않는다. 대남 공작원 파견은 북한 집권당인 ‘노동당’과 ‘인민무력부’(우리의 국방부에 해당)가 담당하는데, 주력 기관은 노동당이다. 한국에 빗대 설명한다면,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에서 북한 침투공작에 가장 열을 올리는 셈이 된다. 정당인 노동당이 대남 공작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간첩사건을 둘러싼 두 번째 문화충돌이다. 레닌이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지도한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 지도부는 모두 ‘혁명’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은 38선 이북에서만, 그것도 소련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공산혁명을 성사시켰다. 귀순자들은 “김일성-김정일은 이북에서만 혁명을 이룬 데 대해 매우 가슴 아파한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는데, 미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때문에 노동당은 미완의 남조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직업 혁명가 파견에 집착한다”고 설명한다.

    남조선 혁명은 노동당의 18개 부 중에서 통일전선부(통전부) 등 4개 부가 담당한다. 한국의 행정부처가 세종로와 과천`-`대전 청사 등지에 나뉘어 있듯, 북한 노동당 산하 부서 역시 평양 시내 7개 청사에 흩어져 있다. 4개 부는 평양시 대성구역 합장동에 있는 3호청사에 몰려 있어, ‘3호 청사’로 통칭된다. 김정일은 노동당 업무를 총괄하는 ‘총비서’이고, 3호청사 업무를 총괄하는 ‘(대남)비서’는 통전부 부장 김용순이다.

    4개부 중 가장 활동적인 곳이 대외연락부와 작전부다. 대외연락부는 남조선 혁명을 위한 직업혁명가 양성과 파견을 담당한다. 한국 방첩기관의 수사망에 걸려들었던 인민혁명당`-`통일혁명당`-`남조선노동당 `-`민족민주혁명당이 바로 대외연락부 소속 직업 혁명가들이 한국내 동조자를 규합해서 구축했던 지하당들이었다.

    혁명 동지 규합은 직업 혁명가가 어떠한 인품과 열정 그리고 지조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대외연락부는 우락부락한 특공대가 아니라 인간미 있는 지식인 중에서 공작원을 선발한다. 이러한 공작원의 대표가 남조선노동당 사건 때의 이선실, 울산 부부 간첩으로 내려온 최정남-강연정, 부여간첩사건 때의 김동식, 그리고 지난 9월 발표된 민혁당사건 때의 진운방 등이다.

    이선실은 한국 주민등록증은 물론 주민등록표까지 가진 후덕해 보이는 70대의 할머니였다. 말레이시아계 화교로 위장했던 진운방은 44세의 장년이었다. 그는 역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종옥청으로 위장한 처(38)와 함께 침투해 서울 논현동에 말레이시아 음식점 ‘삿떼리아’를 운영했었다.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은 점잖게 노는 사업가 진운방에게 깜빡 속아, 개업축하 화분을 보내주기도 했다.

    직업혁명가들은 한국 정세가 조금만 경색돼도 즉각 북한으로 도피하므로, 검거되는 것은 대개 한국인 동조자들이다. 이 경우 반드시 보안법 철폐 논쟁이 벌어진다. 방첩기관이 도마뱀이 끊어놓고 간 꼬리를 들고 “도마뱀이 있었다”고 외치면, 동조세력은 “그것을 갖고 어떻게 도마뱀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고 맞서면서, 북한이 원하는 대로 “보안법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을 위반했다”는 논쟁으로 비화하는 것이다.

    대외연락부는 공작원들에게 직업 혁명가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대단한 혜택을 제공한다. 김동식은 평양에서 기사가 딸린 벤츠를 제공받았고, 이선실은 부부장(차관급) 대우를 받았다. 73년까지 장기간 한국에서 암약했던 전설적인 여성 공작원 ‘정경희’는 평양으로 돌아간 후 일약 장관급인 사회문화부장(현 대외연락부장)에 취임했다. 이에 대해 적잖은 대공수사관은 “정경희는 단번에 부장으로 승진할 만큼 대단히 큰 지하당을 구축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전체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경희가 구축한 지하당 중 일부를 이선실이 이어받은 것까지만 겨우 확인했다”며 곤혹스러워한다.

    작전부는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의 침투와 이들에게 공작금을 전달하는 일, 그리고 공작원이 포섭한 동조자를 대동해 월북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작전부는 해주-남포-원산-청진의 해상연락소와, 개성과 사리원 육상 연락소를 운영하고 있다. 남포와 해주연락소는 공작모선과 이 모선에 싣고 간 반잠수정을 이용해 한국 서남해안 침투를 시도한다. 이중 남포연락소를 출항한 공작모선은 중국 산동반도에 있는 북한 육상기자와 양자강 하구에 정박한 북한 상선으로부터 연료와 식량을 보급받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진연락소는 일본 침투를 전담한다. 지난해 일본 해상보안청의 불심건문을 따돌리고 도주한 괴선박이 바로 청진연락소 소속이었다. 원산연락소는 공작모선과 유고급 잠수정을 통해 한국 동해안과 일본 침투를 병행하는데, 유고급 잠수정을 이용할 때는 추진기로 상륙을 시도한다. 청진과 원산연락소에서 출항한 공작모선은 대화퇴 어장에 계류중인 북한 공작선으로부터 연료와 식량을 재보급받는다.

    간첩사건 때마다 ‘드보크’와 ‘무인 포스트’가 등장한다. 드보크는 한국에서 활동중인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 호신용 무기와 무전기를 파묻어둔 지점이다. 무인포스트는 작전부 소속 안내조와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 접촉하는 약속된 포인트로, 안내조가 이곳에 공작금과 무기 등을 파묻어두면 공작조가 이를 발굴해 간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작전부는 다반사로 육상 침투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전 남방한계선에 철책선을 구축하고 야간점등을 실시한 70년대 후반부터는 육상 침투가 급감했다. 이로 인해 사리원 연락소는 훈련소로 용도가 변경되고, 개성연락소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귀순자들의 얘기다.

    작전부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라는 4년제 공작원 양성 사관학교도 운영한다. 이 대학은 매년 고등학교 졸업자 중에서 실력있고 성분 좋은 학생 160여명을 입교시켜 안내반과 항해반, 기관반, 통신반으로 나눠 교육시킨다. 안내반 출신은 안내조, 항해반 출신은 공작모선과 반잠수정 선장, 기관반 출신은 공작모선 등의 엔진을 조직하는 기관원, 통신반 출신은 통신원이 돼 선후배들과 치열히 경쟁하며 대남 사업을 추진한다. 이 대학은 대외연락부나 대외정보조사부에서 뽑은 공작원을 위탁 교육하기도 한다.

    대외정보조사부는 남조선이 아니라 해외를 무대로 활동한다. 이 부서 요원들 중 상당수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해외로 나오는데, 주임무는 해외로 나온 한국인 납치와 외국을 통한 한국침투다. 대외정보 조사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공작으로는 78년 일어난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87년 11월 김현희와 김승일이 벌인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레바논 국적 필리핀인으로 들어와 단국대 교수로 활동하다 96년 7월 검거된 깐수사건이 있다.

    통일전선부는 적십자회담 같은 남북 대화나 북-일 수교협상 같은 공식 행사에 개입해 통일전선전술을 펼치는 기관이다. 통전부 부장 김용순이 북한 경협창구 중의 하나인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용순은 아태 부위원장 자격으로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을 상대해 금강산사업을 논의했다. 12월3일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村山) 전 총리가 이끈 일본의 초당파 방북단을 상대해 북-일 국교 정상화를 촉구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도 김용순이었다. 이에 대해 귀순자들은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과의 대화에 응하는 것은, 통일전선전술을 펼쳐 궁극적으로 남조선과 일본에서 공산혁명을 완성하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고 분석한다.

    노동당이 지식인을 내세워 혁명운동을 지향한다면, 인민무력부는 특공대를 앞세워 작전 위주로 공작한다. 이러한 인민군 특공 부대에는 정찰국(한국군 정보사에 해당)과 경보교도지도국(교도국·한국군 특전사에 해당)이 있다. 정찰국은 유사시 선제 타격해야 할 목표물에 대해 사전 정찰을 담당하는 부대다. 때문에 평소에도 해상이나 육로로 2인 1조의 정찰조를 침투시켜 정탐(偵探)활동을 수행한다. 침투한 인민군 정찰조가 벌인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78년 11월 발생한 ‘광천 사건’과 96년 9월 일어난 ‘강릉 사건’이 있다.

    광천사건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까지 침투한 정찰조가 발각돼 도주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한국군은 수개 사단을 동원해 간첩색출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정찰조 2명은 포위망을 뚫고 김포반도까지 북상해 해병대 초병을 살해하고 한강 하구를 헤엄쳐 건너 북한으로 돌아갔다. 강릉사건은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좌초함으로써 일어났던 것. 당시 생포된 이광수는 잠수함을 모는 조타원이지, 정찰조는 아니었다. 그때도 정찰조 2명은 초인적인 의지로 포위망을 뚫고 북상을 거듭하다, 사건 발생 45일만인 11월5일 휴전선을 코앞에 둔 연하동 계곡에서 사살됐다.

    교도대는 특수8군단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이 부대가 벌인 대표적인 사건은 68년 12월의 울진-삼척 사건이다. 8군단이 창설되기 직전 이 부대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124군 부대 요원들은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하는 ‘청와대 육박사건’(68년 1·21사태)을 만든 바 있다.

    인민무력부가 개입한 간첩사건에 대해 북한 지도부가 칭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귀순자들은 “울진`-`삼척 사건이 있은 후 김일성은 특수8군단의 투입을 결정한 인민군 지도부를 숙청했다. 이러한 사건은 한국민의 반공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남조선 혁명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노동당 지도부의 생각이다. 강릉사건 때도 역시 정찰국 지도부는 처벌받았다”고 말했다.

    한 귀순자는 “강릉사건을 전형적인 간첩사건으로 아는 사람은 진짜 간첩사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북한 간첩활동은 남조선혁명으로 전환한지 오래다. 남조선 혁명은 성공하면 더없이 좋고, 실패해도 보안법 철폐로 이어지는 꽃놀이패다”고 진단했다.

    간첩소설 “흥미진진하다우요”

    前공작원 김용규씨 비화 책으로 펴내


    지금까지 숱한 귀순자들이 체험기를 출간했지만 공통점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규씨(63)가 쓴 대남공작 비화소설 ‘소리 없는 전쟁’은 그렇지 않다. 김씨는 영웅 칭호까지 받은 노동당 연락부(현 대외연락부) 소속 직업혁명가 출신으로, 76년 9월20일 전남 거문도에서 동료 공작원을 사살하고 귀순했다. 현재 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분석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10년간의 공작원 생활과 동료 공 작원들의 사례를 모아 이 소설을 완성했다.

    ‘소리 없는 전쟁’ 속의 공작원들은 인간적이다. 배에 익숙지 않은 공작원은 공작모선이 고속으로 질주하자 먹은 것을 다 토해낸다. 신물이 넘어올 때쯤 선장은 수면제를 주며 “푹 자라”고 한다. 그 고생 끝에 한국 해안에 상륙한 공작원은 흙냄새부터 맡고 겨우 정신을 차린다.

    작전부 소속 안내자가 고무보트로 공작원을 호송하다 갑작스런 파도에 휩쓸려 물에 빠졌다. 그는 허겁지겁 고무보트로 올라왔는데 그 와중에 총을 빠뜨렸다. 썰물 때면 육지로 변하는 바다에 총을 빠뜨렸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공서방(공작조)이 안서방(안내조)을 보고 마구 야단친다. “너 똑바로 하라우.”

    장기 암약하는 공작원이 한 다방을 오래 출입하다 마담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 이로써 부부로 위장할 수 있게 됐는데, 마담 친구가 “나도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뜻밖에도 ‘옹녀’였다. 공작원은 안되겠다 싶어 SOS를 쳐, ‘변강쇠’ 공작원을 붙여준 뒤 빠져나온다.

    공작원 중에도 무능한 자가 있게 마련이다. 같이 살던 여자에게 공작금을 떼이는가 하면 거액을 쓰고도 지하당 구축에 실패하는 공작원도 있다. 이러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노동당이 검열 공작원을 내려보내는 이야기도 이 소설에 실려 있다.

    김씨는 서울중학 2학년 때 강제 납북돼, 황장엽씨가 강좌장을 맡은 김일성대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남로당 숙청 때 지방으로 밀려났다가 재기해 연락부 공작원이 됐다. 김씨는 귀순 이듬해 동아일보에 ‘평양의 비밀지령’이란 제목으로 수기를 연재했는데, 이 수기는 그후 ‘시효인간’란 제목으로 출간돼 20만부나 팔려나갔다. 김씨는 “소리없는 전쟁을 시리즈로 출간해, 무너지는 대공 경각심을 고취시키겠다”고 말했다.


    주먹 한방이면 끝 북한판 특공의 고수

    자유대련서 국군 특공요원에 전승


    77년 8월19일 임진강을 헤엄쳐 온 이영선씨(42)를 기억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에 특공무술을 생기게 한 주인공”이라고 설명하면, “아!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묵은 기억을 떠올릴 사람이 적지 않다. 이씨는 인민군 9사단 직할 경보병대대 자동소총수로 있다가 귀순했는데, 경보병부대 요원들은 태권도와 유술(유도) 권투 레슬링 등에서 가장 공격적인 품세만 골라서 만든 ‘격술’ (북한판 특공무술)을 단련하고 있었다. 이씨는 9사단 경보병대대원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던 격술 고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귀순후 태권도로 단련한 한국군 특공 요원들과 자주 자유대련을 벌였으나, 압도적인 우세로 전승을 거뒀다. 정보당국은 이씨가 보여준 격술이 정찰국과 교도대 등 인민군 특수 부대는 물론이고 노동당 작전부 요원 등에게도 보급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발차기 위주의 태권도로는 손기술을 중시하는 인민군 격술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실전형 특공무술 개발에 착수해 80년대 초부터 특전사와 특공연대 등에 보급했다. 이씨는 아주 스피드하고 상대 급소만 노리는 인민군 총검술도 보여줬는데, 이에 따라 절도감을 중시하던 한국군도 낭심 때리기를 추가하는 등 공격적인 총검술을 도입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남북 문제에 관한 한 북한은 한국에 휘둘리는 종속변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이 격술을 만듦에 따라 한국이 특공무술을 개발한 것처럼,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씨는 “한국이 북한의 공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라고 경고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