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인사청탁을 한 사람은 패가망신을 시키겠다’던 노 대통령의 이 선택에 측근들은 의문을 표했다. 그가 인사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정 전 수석은 스스로 “광주 YMCA에서 80여 명의 직원들을 장기판의 졸 움직이듯 한 것이 전부”라고 했을 정도로 인사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 노 대통령은 왜 그런 정 전 수석을 선택했을까. 노 대통령은 당시 측근들의 궁금증을 ‘아마추어론’으로 풀어주었다.
포지티브 자료로 리스트 작성
“전임 정권이 모두 인사 전문가를 기용했다. 그런데 인사가 잘된 적이 있었는가. 정 보좌관은 인사 경험이 없지만 건강한 양식을 지녔다.”
참여정부 초기 대통령 인사보좌관실은 전임 정부로부터 7만2000명의 ‘리스트’를 전해 받았다. 이 자료를 분석하던 보좌관실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먼저 자료가 온통 ‘네거티브’ 일색이었다. ‘누가 뭘 잘한다’는 내용보다 ‘이런 문제가 있다’는 식의 네거티브한 측면을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사보좌관실은 이 자료를 포지티브 자료로 바꾸었다. 인사 리스트도 8만 개로 늘렸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들에게는 별도로 메일을 보냈다.
‘최근 5년간 쓴 저서가 있는가. 학회에 발표한 논문이 있는가. 연구한 분야의 업적에 대한 자료를 보내달라.’
크로스 체크는 기본이었다. 경제관료나 재계 인물을 스크린할 경우 20여 년간 경제부처를 출입한 언론인에게 전화를 걸어 인물평을 부탁했다. 웬만한 인사의 장단점은 전화 서너 통이면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000명 정도의 압축자료를 별도로 만들었다. 이것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정무직’ 인사들의 존안카드로 활용된 ‘X파일’이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노 대통령이 인사에 관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필요한 경우 인사팀에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참여정부 초기 개각을 전후해 거론된 경남 거창고 전성은 교장의 교육부총리 입각 문제였다. 그의 발탁을 점친 사람은 “노 대통령이 전 교장의 교육개혁 마인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노 대통령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부총리 직에 오르지 못했다.
“문교부 장관이 아니라 교육인적자원부의 장관은 주로 대학교육을 담당해야 하는데, 전 교장은 그 부분이 취약한 것 같다”는 평가를 접한 노 대통령이 곧바로 ‘고집을 꺾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이 사람을 발탁하라”는 식의 주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면 노 대통령은 “뭘 하던 사람이지요”라고 물었다.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 <br>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br>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그러나 선거를 치른 정치인은 신세를 갚아야 할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가 대권을 거머쥔 대통령이라면 주변의 기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청와대 담을 넘어 대통령을 압박한다. 전임 대통령 대부분이 이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로 인해 편법으로 ‘낙하산 부대’를 운영했다. 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당대에 개혁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컸다. 집권세력은 이전 정부를 통해 정부 요직에 자리잡은 관료들이나 정부투자기관 인사들의 이념과 자질에 의혹을 갖기 시작했다. 이른바 ‘코드’를 통한 평가였다. 그 전면에 노 대통령이 섰다. 노 대통령은 자질과 경륜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코드와 철학이 맞으면 중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수시로 피력했다. 곳곳에서 코드로 무장한 ‘젊은 피’의 수혈작업이 이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인사의 틀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대중(DJ) 정부 시절 차관급으로 활동하던 한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참여정부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면평가 등 인사 시스템의 문제점을 놓고 386 인사들과 토론할 때였다. ‘공직사회는 기업조직과 다른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을 이해하며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한 386 인사가 ‘그런 생각을 뜯어고치기 위해 대대적인 인사개혁이 필요하다’며 나를 공박했다.”
부하 직원과 함께 있던 이 인사는 막냇동생보다 어린 이 386의 ‘기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인사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비교적 공정하게 진행되던 참여정부의 인사 원칙이 이질적인 ‘색깔’ 앞에만 서면 난폭한 질주를 시작했고, 이 과정을 통해 386 인사의 호언이 현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사 적체에 허덕이던 노무현 사단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지만, 무너진 초심과 훼손된 인사원칙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점증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시스템 인사의 전형이라고 자랑하던 공모제는 낙하산 인사를 조장하고 앞장서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된 영상홍보원장 사례가 공모제의 이런 허점을 잘 보여준다.
당대에 개혁 완성 강박감
3년 임기의 신임 영상자료원장 선임은 당초 7월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영상자료원은 6월15일부터 29일까지 공모를 하고 신임 원장 추천위원회(이하 추천위)를 구성했다. 영화배우 장미희 씨(명지대 교수) 등 7명의 추천위원들은 서류 전형에서 후보를 3배수(3명)로 압축, 문화관광부(이하 문광부)에 명단을 전달했다.
8월16일 전해철 청와대 민정수석(왼쪽)과 박남춘 청와대 인사수석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차관에 대한 조사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지내놓고 보니 청와대가 유 전 차관에게 청탁한 인사가 있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L 씨다. 그 사람은 3인의 후보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재공모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기억한다.”
권력이 뒤를 봐주는 인사 앞에서 공모제 같은 인사 시스템은 큰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정부부처나 특정 인사들이 “청와대 뜻은 쫛쫛쫛에게 있다”고 넌지시 추천위원들에게 알리면 인사의 절반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추천위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가리키는 후보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좌지우지
2005년 5월 당시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공모를 통해 뽑은 한국조폐공사 신임 사장 후보 2명을 청와대에 올렸다. 청와대는 “적격자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조폐공사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얼마 후 낙하산 인사가 내정됐다는 ‘설’과 명단이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력서를 제출하는 미련한 사람은 없다. 이해성 전 대통령 홍보수석비서관이 신임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그 얼마 뒤였다.
권력의 핵심과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인사 성공률은 높아진다. 로열 패밀리 주변은 이런 권력 논리에 따라 항상 붐빈다. 참여정부 초기 노 대통령의 형 건평 씨 주변에 이력서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가 문제가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청와대는 이후 김해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봉쇄했다고 주장했다.
친인척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민원인들은 권력자와 가까운 또 다른 실세들을 찾아나선다. 참여정부 출범 후 실세로 부상한 몇몇 인물 주변에 인사와 관련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여권 내부에서는 실세로 알려진 Q 씨와 Z 씨를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파다했다.
특히 Q 씨의 경우 광범위한 인맥 자료를 통해 참여정부의 코드 인사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영남 후보는 전멸하다시피 했다. 추풍낙엽처럼 스러진 인사들을 거둬준 사람이 바로 Q 씨로 알려졌다. 당의 한 관계자는 “경부선 열차가 만원이었다”는 말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인사 문제는 항상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경쟁은 불가피하다. 이로 인해 동지끼리 혈투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Q 씨와 Z 씨의 사례가 그렇다. 2006년 상반기 두 인사는 정부투자기관 인사를 놓고 ‘심하게’ 붙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던 두 사람은 이 인사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진검승부에 나섰다는 것. 결국 이 싸움은 Q 씨의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이광재 의원과 안희정 씨 등 친노(親盧) 직계인사들도 참여정부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인사를 주도한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인사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통해 자리를 잡았다”는 후문은 끊이질 않는다. 참여정부 인사를 담당하던 한 관계자는 “386 인사를 비롯해 대통령 주변에서 인사를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월2일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가운데)이 춘추관에서 개각 인사 명단을 발표한 후 기자실을 나서고 있다.
인사 개입 흔적도 확인된다. 2003년 여름, 이 의원이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X 씨를 통상교섭대사에 앉혀달라”는 민원을 전달했다. 여성인 X 씨는 미국 백텔사와 연이 있는 인물로, 당시 백텔사는 전후 이라크 복구사업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 의원은 X 씨를 대사직에 앉혀 백텔사의 이라크 공사 물량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원의 인사 청탁은 의도 자체는 순수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인사 추천은 아니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인사 관계자는 그러나 “그들이 추천했다고 해서 자격과 기준이 미달한 사람을 발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2005년 1월 출범한 한국증권선물거래소의 이사장 선임 과정도 실세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인사였다. 당시 이사장 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3명의 후보가 갑자기 사퇴했다. 후보들은 이사장 직에 큰 애착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중도하차는 이례적인 일로 평가됐다.
얼마 뒤 그들의 사퇴에 관한 비밀이 풀렸다. 후보추천위원이던 K 씨가 “청와대 인사에게서 청탁 전화를 받고 압력을 느꼈다”고 밝힌 것. 그 직후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떨어진 이영탁 전 국무조정실장이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한 여권 인사는 이 공모에 지인을 추천했다가 나중에 심한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친구가 그 자리엔 이미 후보자가 내정됐으니 가지 말라고 하더라. 나를 들러리로 세운 이유가 뭐냐.”
최근 기승을 부리는 낙하산은 당·청 간 공식 채널보다 청와대와의 개인적인 인맥 위주로 전개된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과 가까운 한 의원실은 ‘낙하산을 가장 잘 날리는’ 의원실로 소문이 났고, 요즘도 이력서가 쇄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낙하산 대열에 합류한 인사들의 얼굴에는 초조감이 묻어난다. 일(인사)이 생각대로 풀리지도 않고, 가봐야 노조가 낙하산이라며 앞을 가로막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은 없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들 사이에선 청와대가 과거 같지 않다는 불평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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