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신체 리듬을 유지해주는 신경세포인 ‘생체시계’가 있다.
몇 집에 한 명꼴로 꼭 있다. 부모는 방학이라고 늦게 일어나는 아들딸이 영 못마땅하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러면서도 밤만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
“잠이 쏟아지는 걸 어떡해요?”
부모는 TV나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 자식들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든지 알지 못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수면위상지연증후군(Delayed Sleep-Phase Syndrome, DSPS)’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DSPS 환자는 남들처럼 제때 일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고, 늘 불면증을 호소한다. 주로 10대와 20대 초반에서 10여 명 중 1명꼴로 나타난다.
유전적 요인도 생체시계 고장에 영향
이들 중 상당수는 몸속에서 심장 박동, 호르몬 분비 등 신체리듬을 유지하는 신경세포인 ‘생체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유전적 결함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늦잠 자는 자녀의 부모들도 젊었을 때는 똑같이 아침잠이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생체시계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산다. 외국에 나가 시차 적응이 안 돼 고충을 겪을 때나 떠올릴 뿐, 평소엔 늦잠을 자든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있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 봤자 몸에 별 이상이 있겠느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최근 생체시계의 리듬이 깨질 경우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물론 빨리 늙을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생체시계는 생활이 불규칙적이거나 일조량이 부족할 때 크게 영향을 받는다. 교대 근무로 낮과 밤이 바뀌는 사람들이나 하루 종일 사무실 안에서만 일하느라 ‘광합성’을 할 시간조차 별로 없는 직장인들은 자신의 생체시계가 건강하게 작동하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시간과 생체시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지난해 독일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의 틸 뢰네베르크 교수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4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생체시계가 실제 시간보다 2시간 이상 느렸다.
문제의 원인은 일조량 부족 때문이었다. 생체시계는 우리 눈이 받아들이는 빛의 양에 따라 리듬을 조절하기 때문에 빛이 약하면 정확히 시간을 인식하지 못하고 일종의 ‘리셋’ 버튼을 눌러 시간을 새로 설정한다. 이 과정에서 실제 시간과 생체시계 사이에 ‘시차’가 생기고, 나아가 불면증 등이 나타난다. 실제로 북유럽을 비롯한 고위도 지역에서는 생체시계 장애 사례가 저위도 지역보다 더 많이 보고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실내 환경에 있다. 건물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시인들은 하루에 평균 10~15분 정도만 햇볕을 쬔다. 실내조명에서 받는 빛의 밝기(50~500lux)는 야외(5000~10만lux)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받는 빛에 비해 훨씬 적다. 뢰네베르크 교수는 “사회적 시차가 큰 사람일수록 쉽게 피곤해지고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생체시계의 고장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햇볕을 쬐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 클리블랜드 러너연구소 마리나 앤토크 박사팀은 생체리듬의 불균형이 노화를 앞당긴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연구팀이 실험용 쥐에서 24시간을 주기로 신체기능을 조절하는 체내시계 유전자를 제거하자 노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체내 활성산소 농도가 최대 50% 이상 높아졌고, 수명이 급격하게 짧아졌다. 뿐만 아니라 심장, 폐, 신장, 정소 등이 수축되고 심지어 탈모, 백내장 증상까지 나타났다. 생체시계가 망가지니 조로증(早老症)이 일어난 것이다.
오래 살려면 햇볕을 쬐라
아무도 늙어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생체시계 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각자 생체시계의 리듬에 맞춰 일어나고, 일할 준비가 됐다고 느낄 때 출근하는 것이다. 뢰네베르크 교수는 “노동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적 시차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전문가들은 대신 “햇볕을 많이 쬐라”고 권한다. 틈틈이 밖에 나가 햇볕을 한껏 누려보자. 생체시계 리듬이 정상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뢰네베르크 교수는 “버스와 기차 지붕을 유리로 바꿔 출퇴근길에 더 많은 햇볕을 쬐도록 하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조금 거추장스럽지만, 선글라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늦은 저녁 이후에 강한 빛을 보면 생체시계가 정상보다 느려져 늦게 잠들게 된다. 이때 선글라스를 이용하면 부적절한 시간에 빛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레드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좋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 마르첼로 이리티 박사팀은 6월 ‘식품농학저널’을 통해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8종의 포도껍질 추출물을 분석한 결과 멜라토닌이 많이 함유돼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멜라토닌은 밤이 되면 생체시계에 ‘이제는 잠들 시간’이라는 신호를 보내 수면을 도와주며 리듬을 정상으로 돌려준다.
일부 국가의 경우 멜라토닌이 현재 알약으로 시판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2000만명 이상이 불면증 치료 등을 위해 멜라토닌을 복용한다. 장거리 비행을 한다면 시차 적응을 위해 기내에서 잠들기 전 섭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멜라토닌이 많이 들어 있는 토마토, 바나나 등의 과일을 섭취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소주나 맥주는 알코올 성분이 멜라토닌의 작용을 억제해 숙면을 방해하므로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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