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단 시키(四季)가 국내 대기업 롯데가 지은 최초의 뮤지컬 전용극장 샤롯데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나는 작품은 미국 월트 디즈니사의 ‘라이언 킹’. 1200석 규모의 뮤지컬 전용극장은 대규모의 자본(‘라이언 킹’의 제작비는 25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이 투입되는 작품의 장기 공연을 가능하게 했다. 디즈니사의 ‘라이언 킹’은 원시적인 생명력이 가득한 힘 있는 음악, 가면을 이용한 아름답고 독특한 캐릭터 묘사, 역동적인 무대어법으로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올려진 이래 뉴욕, 런던을 비롯한 세계 뮤지컬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한마디로 대박 문화상품이다.
극단 시키는 한국 기업이 제공한 전용극장과 미국에서 얻은 막강한 콘텐츠를 무기로 한국 공연시장을 파고든 셈이다. 시키의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감동을 주는 작품 제작’ ‘공정한 캐스팅 시스템’ ‘합리적인 티켓 가격’을 한국 진출의 이유로 들면서 모든 수익은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한국에 재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전 실패 후 치밀한 작전
그러나 이에 대한 국내 반응은 하나로 일치하지 않는다. 뮤지컬 제작자가 중심이 된 한국뮤지컬협회(이하 협회) 측은 시키의 한국 진출이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이며, ‘국내 뮤지컬 시장 잠식’ ‘국내 최초의 전용극장에 대한 독점적 사용은 특혜이자 공정 경쟁 위배’라는 논리를 펴며 시키 측과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제작자와 입장이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은 시키의 한국 진출을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이 같은 논리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다. 배우들 처지에서 보면 외국 뮤지컬을 들여와 원래의 매뉴얼대로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을 동원해 공연하는 메커니즘은 국내 제작사나 시키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단지 국적 때문에 편을 가른다면 너무 시대착오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관객들의 입장은 좀더 분명하다. 대부분의 뮤지컬 마니아들은 좋은 공연을 합리적인 가격(시키는 장기공연 덕에 국내 여타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30%가량 저렴한 9만원의 티켓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에 볼 수 있다면 누가 제작했는지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협회의 반대 논리는 공연계 안과 밖(특히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얻지 못했고, 시키의 한국 진출을 막을 실질적 수단이나 효과적인 대응책도 찾지 못했다.
협회의 공세적인 반대에 ‘조용히 할 말만 한다’는 식으로 방어하는 시키를 보고 있노라면 떠들썩한 소리에 비해 알맹이가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협회가 쓸 무기가 제한돼 있는 데다, 시키의 교묘한 전략을 파고들 수 있는 날카로움마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2년 전 시키는 문화 교류를 내세우며 한국 진출을 선언했다가 당시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의 강력한 반대와 독도 문제로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철회한 적이 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다시 한국 진출을 추진하면서 “한국 뮤지컬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쳐 관객과 배우들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공연계의 문제를 짊어지겠다는 ‘과대망상’적 책임감, 한국 뮤지컬계 스스로의 치유 능력을 무시하는 오만함을 엿볼 수 있는 이 발언의 실제 의도는 한국 제작자와 배우, 관객을 편 갈라 여론의 역풍 없이 한국에 진입하겠다는 데 있다.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는 제작자들을 설득하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쉬우니 말이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의 말을 빌리면, “티켓 가격을 낮추는 데 꼭 필요한 전용관 문제로 15년 동안 롯데의 신격호 회장을 설득”했고, 1997년 이후 ‘한국 배우들을 데려다 트레이닝 및 캐스팅해 현재 시키 소속의 한국배우가 6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치밀한 그의 작전에 협회가 말려들었다. ‘라이언 킹’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들은 협회가 제작하는 뮤지컬에 캐스팅하지 않겠다는 등의 말은, 협회가 쓸 카드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창작 뮤지컬 제작 ‘발등의 불’
시키의 한국 진출은 한국 뮤지컬계를 나름대로 정확히 진단한 결과로 보인다. 2001년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인 RUG사의 ‘오페라의 유령’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우리 뮤지컬계는 외국작품을 들여와 복사, 생산하는 구조로 시장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뮤지컬 제작사들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 과감하고 공격적인 마케팅과 홍보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공연계에 거대 자본을 끌어와 시장을 확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자와 마케팅, 홍보에 주력하느라 관객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작품에 걸맞은 능력 있는 배우와 스태프를 찾기보다는 지명도와 개인적 친밀도에 의존했다. 무엇보다 고유의 창작 작품을 제작하는 데 과감하지 못했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복사하는 제작 능력과 새로운 색깔의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영국과 미국의 작품을 복사하는 능력은 60년대에 시작한 그들이 훨씬 앞서 있고, 시장을 확대하고 점유하는 방식은 이미 일본에서 실험을 거친 바 있다.
시키는 세계 연극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덩치를 자랑한다. 700명에 이르는 소속 배우, 400명에 이르는 스태프, 연 3000회의 공연 횟수, 일본 내 9개에 이르는 전용극장, 연 관객 300만명에 이르는 대규모다. 일본 공연시장에서 시키의 위치는 독점적이라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은 시키 극단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합리적인 가격은 시키의 독점적 위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시키 역시 세계에 내놓을 고유의 뮤지컬을 제작하지 못했다. 이 점이 시키가 한국 진출을 서두르는 이유다. 한국이 미국과 영국의 뮤지컬을 복사해 시장을 확대하는 시기를 지나 고유의 콘텐츠를 확보하게 되면, 시키가 한국 진출을 통해 수익을 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로소 한국 뮤지컬계는 수입 뮤지컬로 시장을 확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절감하고 창작 뮤지컬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전통적인 창작 극단인 서울뮤지컬 컴퍼니, 에이콤 외에도 30, 40대 젊은 제작자들이 창작과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키의 한국 진출이 정말로 우려스러운 까닭은 이러한 흐름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키 극복의 해답도 결국 같은 곳에 있다. 브로드웨이, 웨스트 엔드와 차별화되는, 우리 정서의 음악과 이야기로 우리의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극단 시키는 한국 기업이 제공한 전용극장과 미국에서 얻은 막강한 콘텐츠를 무기로 한국 공연시장을 파고든 셈이다. 시키의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감동을 주는 작품 제작’ ‘공정한 캐스팅 시스템’ ‘합리적인 티켓 가격’을 한국 진출의 이유로 들면서 모든 수익은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한국에 재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전 실패 후 치밀한 작전
일본 극단 시키의 아사리 게이타 대표.
하지만 제작자와 입장이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은 시키의 한국 진출을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이 같은 논리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다. 배우들 처지에서 보면 외국 뮤지컬을 들여와 원래의 매뉴얼대로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을 동원해 공연하는 메커니즘은 국내 제작사나 시키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단지 국적 때문에 편을 가른다면 너무 시대착오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관객들의 입장은 좀더 분명하다. 대부분의 뮤지컬 마니아들은 좋은 공연을 합리적인 가격(시키는 장기공연 덕에 국내 여타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30%가량 저렴한 9만원의 티켓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에 볼 수 있다면 누가 제작했는지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협회의 반대 논리는 공연계 안과 밖(특히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얻지 못했고, 시키의 한국 진출을 막을 실질적 수단이나 효과적인 대응책도 찾지 못했다.
7월에 열린 토론회. 일본 극단의 한국 진출에 대한 제작자들과 배우 및 관객과의 시각차가 분명히 드러났다.
2년 전 시키는 문화 교류를 내세우며 한국 진출을 선언했다가 당시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의 강력한 반대와 독도 문제로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철회한 적이 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다시 한국 진출을 추진하면서 “한국 뮤지컬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쳐 관객과 배우들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공연계의 문제를 짊어지겠다는 ‘과대망상’적 책임감, 한국 뮤지컬계 스스로의 치유 능력을 무시하는 오만함을 엿볼 수 있는 이 발언의 실제 의도는 한국 제작자와 배우, 관객을 편 갈라 여론의 역풍 없이 한국에 진입하겠다는 데 있다.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는 제작자들을 설득하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쉬우니 말이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의 말을 빌리면, “티켓 가격을 낮추는 데 꼭 필요한 전용관 문제로 15년 동안 롯데의 신격호 회장을 설득”했고, 1997년 이후 ‘한국 배우들을 데려다 트레이닝 및 캐스팅해 현재 시키 소속의 한국배우가 6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치밀한 그의 작전에 협회가 말려들었다. ‘라이언 킹’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들은 협회가 제작하는 뮤지컬에 캐스팅하지 않겠다는 등의 말은, 협회가 쓸 카드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창작 뮤지컬 제작 ‘발등의 불’
시키의 한국 진출은 한국 뮤지컬계를 나름대로 정확히 진단한 결과로 보인다. 2001년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인 RUG사의 ‘오페라의 유령’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우리 뮤지컬계는 외국작품을 들여와 복사, 생산하는 구조로 시장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뮤지컬 제작사들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 과감하고 공격적인 마케팅과 홍보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공연계에 거대 자본을 끌어와 시장을 확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자와 마케팅, 홍보에 주력하느라 관객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작품에 걸맞은 능력 있는 배우와 스태프를 찾기보다는 지명도와 개인적 친밀도에 의존했다. 무엇보다 고유의 창작 작품을 제작하는 데 과감하지 못했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복사하는 제작 능력과 새로운 색깔의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영국과 미국의 작품을 복사하는 능력은 60년대에 시작한 그들이 훨씬 앞서 있고, 시장을 확대하고 점유하는 방식은 이미 일본에서 실험을 거친 바 있다.
시키는 세계 연극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덩치를 자랑한다. 700명에 이르는 소속 배우, 400명에 이르는 스태프, 연 3000회의 공연 횟수, 일본 내 9개에 이르는 전용극장, 연 관객 300만명에 이르는 대규모다. 일본 공연시장에서 시키의 위치는 독점적이라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은 시키 극단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며, 합리적인 가격은 시키의 독점적 위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시키 역시 세계에 내놓을 고유의 뮤지컬을 제작하지 못했다. 이 점이 시키가 한국 진출을 서두르는 이유다. 한국이 미국과 영국의 뮤지컬을 복사해 시장을 확대하는 시기를 지나 고유의 콘텐츠를 확보하게 되면, 시키가 한국 진출을 통해 수익을 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로소 한국 뮤지컬계는 수입 뮤지컬로 시장을 확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절감하고 창작 뮤지컬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전통적인 창작 극단인 서울뮤지컬 컴퍼니, 에이콤 외에도 30, 40대 젊은 제작자들이 창작과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키의 한국 진출이 정말로 우려스러운 까닭은 이러한 흐름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키 극복의 해답도 결국 같은 곳에 있다. 브로드웨이, 웨스트 엔드와 차별화되는, 우리 정서의 음악과 이야기로 우리의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