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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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저작권 위임 ‘이상한 횡포’

학술진흥재단, 외국 박사 학위신고필증 발급 … “강제로 논문이용동의서 받는 것은 월권”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6-08-23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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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저작권 위임 ‘이상한 횡포’
    한국인 최모 씨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은 돈을 내야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공짜로도 볼 수 있다. 그것도 하나의 웹사이트 안에서 그러하다. 국내외 학술 정보를 서비스하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www.riss4u.net·이하 학술정보원)이 바로 그곳.

    사연인즉 이렇다. 정부출연기관인 학술정보원은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하 외국 박사)들의 학위논문을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으로부터 ‘공짜로’ 공급받아 역시 공짜로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학술정보원은 외국의 논문데이터뱅크회사와 제휴를 맺고 미국 및 유럽의 상위 20위권 대학 박사 학위논문의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원문을 내려받는 데 드는 비용은 편당 1만5000원.

    학술정보원에 공짜로 넘겨줘

    당연히 이 외국 논문 중에는 해외 우수대학에서 유학한 한국인들의 논문도 포함돼 있다. 최 씨 논문의 경우처럼 ‘유료’와 ‘무료’로 동시에 서비스될 수도 있는 셈인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학술정보원은 데이터뱅크로부터 논문 목록을 넘겨받아 이미 공짜로 공개돼 있는 한국인들의 외국 논문을 검색목록에서 삭제하고 있다. 학술정보원 관계자는 “최 씨 논문은 이러한 삭제 과정에서 실수로 누락된 듯하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학진은 어떻게 외국 박사의 논문을 학술정보원에 공짜로 넘겨줄 수 있을까? 그것은 학진이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를 대신해 외국 박사들에게 ‘외국박사학위신고필증’을 발급하면서 이들로부터 의무적으로 ‘논문이용동의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이용동의서란 간단하게 말해 논문의 저작권을 학진에 위임하는 것이다. 논문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나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을 통해 복제·배포·전송하는 것을 허락하는 이 동의서는 외국 박사들이 학진에서 신고필증을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의무’ 서류 중 하나다. 저작권의 위임 기간은 3년. 그러나 별도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위임 기간은 자동 연장된다.

    학진은 이렇게 저작권을 위임받은 외국 박사 논문들을 학술정보원에 공짜로 공급할 뿐만 아니라, 학진 홈페이지에서도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논문 초록을 한국어로 써서 제출하는 것도 외국 박사들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학진이 저작권 위임을 강제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단순하게 교육부로부터 외국 박사 학위를 신고받는 업무를 위임받아 하면서 ‘논문 저작권 위임’을 의무사항으로 슬쩍 ‘끼워넣기’ 한 셈이기 때문이다. 외국 박사 학위 신고는 교육부 훈령(제696호)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데, 이 훈령에는 논문 이용 동의에 관한 내용이 단 한 마디도 언급돼 있지 않다. 교육부는 모르는, 학진만의 일인 셈이다.

    하지만 외국 박사들은 학진의 이 같은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학진이 발급하는 신고필증 없이는 취직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국내 대학들은 ‘가짜 박사’를 걸러낼 목적으로 교수나 강사직에 지원하는 외국 박사들에게 학진의 신고필증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학진으로부터 각종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도 신고필증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문학박사를 받은 주모 씨는 “시간강사 모집에 응시하려면 학진 신고필증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용도 잘 모른 채 서명했다”고 했다.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김모 씨 또한 “내가 몇 년 동안 땀 흘려 연구한 결과물이 학진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동의서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직 응시원서 마감일이 임박해 서명하고 말았다”고 했다.

    논문 저작권 위임 ‘이상한 횡포’

    한국학술진흥재단은 홈페이지에 외국 박사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며, 이를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도 제공하고 있다.

    앞에서 사례로 든 최 씨 또한 교수직 지원을 위해 ‘남들이 관례적으로 하듯’ 논문이용동의서에 서명했다. 최 씨는 “미국에서는 졸업할 때 학생 개개인이 카피라이트(저작권 보호)와 카피레프트(저작권 공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며 “대부분 카피라이트를 선택하고 유료 논문데이터뱅크에 자신의 논문을 등록한다”고 전했다.

    최 씨는 얼마 전 미국의 데이터뱅크가 한국으로 보내준 13달러를 받았다. 몇몇 사람이 자신의 논문을 내려받은 데 대한 저작료였다. 그는 “카피라이트를 택하는 이유는 저작권료를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 무단으로 내 논문을 도용했을 때 대응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씨는 “나 스스로 학진에 동의했으므로 내 논문이 무료로 공개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누군가 내 논문을 도용했을 때 학진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질 것인지는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용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학진은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최 씨가 서명했던 동의서에는 ‘학진은 위임 서약 이후 발생하는 권리침해에 대해 일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도용 사건 일어나도 법적 책임은 없어

    학진은 왜 외국 박사의 논문들을 탐낼까? 지나친 전자도서관 경쟁 탓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인터넷 강국’답게 우리나라는 전자도서관 구축이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각 대학 도서관들이 앞다투어 자기 대학의 학위논문들을 전산화하고 있고, 또 대학끼리 전산화한 논문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 대학도 석·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논문이용동의서를 받는다. 서울대도서관 관계자는 “요즘에는 아예 인쇄되는 논문 맨 앞 장에 이용동의서를 끼워넣어 제본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이용동의서에 서명만 하면 대학도서관은 논문저자에게 단 한 푼의 저작료도 지급할 의무가 없다. 이러한 추세에 대해 저작권심의위원회 김현철 연구원은 “저작권 보호를 확실하게 하는 외국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평했다.

    물론 이용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학위를 취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서명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서울대도서관 관계자는 “서명하지 않으려는 학생은 그 이유를 학교 측에 문서로 제출해 총장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기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논문들에 대해서는 대학도 저작권에 대한 권리가 일부 있다는 것이 대학 도서관들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작권심의위원회 최경수 연구실장은 “대학은 학위를 줄지 말지만 판단할 뿐이지, 그 지위를 이용해 저작권을 가져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물며 유학생활을 하는 데 단돈 1달러도 보태준 바 없는 학진에 그러한 권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숙명여대 강형철 교수(언론학부)는 “무료로 논문을 공개한다는 취지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공개 여부를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도록 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실장은 “저작권 위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신고필증을 발급해주지 않는 것은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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