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26일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 회의 모습.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06년 2월 현재까지 수년째 북한 인권에 대해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인권위는 2006년 1월31일 ‘국가인권위원회법 해설집’을 통해 “북한 인권 문제를 인권위가 북한 정부에 직접 권고할 의무는 없지만 한국 정부에 위원회 입장을 전달할 수는 있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 ‘북한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를 상대로 인권위의 ‘입장’을 전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입장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언제쯤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계속되는 침묵과 해설집을 통한 이 같은 발표는 논란을 불렀다.
인권위는 북한 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내부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해왔다. 그러나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의 요청으로 인권위가 국회에 제출한 2005년 12월12일 25차 인권위 전원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일부 인권위 위원은 인권위가 북한 정부를 상대로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위원은 “인권위가 북한 인권에 침묵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인권위의 북한 인권 침묵에 대해 인권위 내부에서도 이처럼 반발이 있었으나 인권위원장은 이를 ‘소수 의견’으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05-11 북한인권 관련 논의〔재상정〕비공개’ 제하의 A4 용지 26장 분량의 인권위 회의록에 따르면, 조영황 인권위원장은 이날 회의를 한 이유에 대해 “국회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왜 인권위원회는 북한 인권을 다루지 않느냐’는 질의를 했고, 일부 언론에서 ‘인권위는 왜 북한에 대해 침묵하는가’는 보도도 많이 한다. 인권위가 북한의 지위를 어떻게 보고, 북한에 대해 직접 언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권위 회의록은 위원장을 뺀 나머지 위원들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북 정권은 최악의 인권불모 지대”
회의록에 따르면 한 위원은 이 자리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인권위가 의견 표명을 하자”고 밝힌 것으로 돼 있다. 인권위가 발표한 해설집 내용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편 것이다.
이 위원은 그 이유에 대해 “북한 정권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을 관장하고 있는 법적 주체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최악의 인권볼모 지대를 통치하는 주체다. 그런 북한 정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누구한테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인가”라고 설명했다.
인권위원회 내에선 ‘북한 주민은 한국 국민으로 보기 어려운 특수한 법적 지위에 있기 때문에 인권위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의견을 표명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논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위원은 전원위원회에서 이런 논리를 비판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를 법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위의 영역을 스스로 좁히는 것이다. 인권은 국경이 없는 보편적 가치인데 여기에 왜 국경을 설정하느냐”고 밝혔다.
2005년 12월12일 인권위 전원위원회 회의록 사본.
한 위원은 “인권위가 북한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법률적 근거가 있다”는 주장도 폈다. “남북관계기본법 제9조에 우리 정부가 한반도 분단으로 인한 인권 개선에 노력할 것을 정부의 의무로 부과하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인권위)가 북한 인권에 대해서 일정한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원위원회에선 “탈북자 인권 문제를 논할 때는 중국 정부에 대해서도 인권위가 의견 표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북한 인권 거론은 법률적 근거 있다”
회의록의 다른 부분에서 한 위원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해 침묵한 미국에 우리도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느냐”며 북한 인권에 대한 인권위의 침묵을 꼬집었다. ‘북한 주민의 국적 등 법률적 문제가 침묵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의 연장선이었다. 더욱이 북한 주민은 외국인과는 다른, 동질성이 강한 같은 동포라는 주장이다.
다음은 이 위원의 발언 내용이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외국의 목소리를 갈구했는가. 당시 카터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이고 각 사회단체에서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당신들이 대한민국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 아니냐. 왜 자유를 억압하는 박 정권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하느냐’며 미국 정부에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1~2년 뒤인 5·18민주화운동 당시 우리는 또 얼마나 외국의 구원의 목소리를 갈구했는가. 인권은 국경이 없는 문제다. 북한 동포가 험한 상황에 있을 때 남쪽의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목소리를 내겠는가.”
이 위원은 “우리가 이 상황에서 침묵한다면 그야말로 역사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맺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이 발언이 끝나자 조 위원장은 “이 부분은 개인적 의견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머지 분들은 북한을 특수한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견해에 찬동하는 것으로 정리하도록 합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에 대해 인권위가 직접 권고를 하거나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것으로 합니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북한의 특수한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견해’란 “북한은 독립된 국가이면서 동시에 외국으로 절연할 수 없는 특수한 관계다. 독립된 국가라고 했을 때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잣대에 맞춰 문제가 많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권위가 북한 정부에 대해 직접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조 위원장은 이 견해가 인권위 위원 다수의 견해이고, 북한 정부에 입장을 밝히자는 견해는 소수의 견해이므로 ‘북한 정부에 대해 인권위가 직접 입장 표명을 할 수 없다’고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주호영 의원은 “인권위 내부에 ‘북한 정부에 인권 개선을 권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인권위 밖에선 이같은 의견의 여론이 많다. 상당수 북한 주민과 탈북자는 영화 ‘태풍’의 주인공처럼 생존의 기로에 놓여 있다. 정부와 인권위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