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목 영덕군수가 S건설 K 사장에게 써준 확약서와 한수원이 방폐장 유치전에 뛰어들었던 자치단체에 보낸 공문(왼쪽). 한수원은 이 공문에서 방폐장 유치와 관련한 각종 경비를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2005년 8월24일 경북 영덕군 핵폐기장 설치반대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 200여명은 영덕읍에서 `방폐장 유치를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했다.
김 군수는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한수원·사장 이중재) 등 관계기관이 돈을 빌려 유치활동을 하면 소요 경비는 보전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돈을 빌려 방폐장 유치전에 나섰다. 그러나 방폐장 부지가 선정된 직후 경비 보전을 약속했던 한수원 측이 “홍보활동 기간(2005년 6월16일~9월15일)에 쓴 돈과 자치단체 예산임이 밝혀진 것만 보전해준다는 원칙을 위반했다”며 영덕군의 유치활동비 보전을 거부해 졸지에 채무자로 전락한 것.
조만간 영덕군 예산 가압류 신청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것은 영덕군에 돈을 빌려준 S건설 K 사장도 마찬가지. 그는 “한수원 이중재 사장이 자금을 지원하면 나중에 보전하고 건설 물량도 배정하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투자했는데 결국 원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며 법정 투쟁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 강신헌 홍보실장은 “이 사장은 ‘도와주면 지원금은 국가가 보전해준다’는 말은 했지만 다른 약속을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K 사장은 조만간 영덕군 예산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할 예정. 이와 별도로 김병목 영덕군수와 한수원 이 사장을 사기혐의로 고소할 예정이다. 이 사장이 자치단체와 사기업을 속여 방폐장 유치전에 동원했다는 것이 고소 내용의 골자. 19년 한을 푼 방폐장은 날개를 달고 비상을 시작했지만 그 이면에 자리 잡은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13억원을 둘러싼 K 사장과 영덕군, 한수원의 악연은 2005년 5월 말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국전력 내 이 사장 집무실에서 시작됐다. 당시 K 사장은 김영삼(YS) 정권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전 의원의 보좌관 K 씨, 국책사업 영덕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 N 씨 등과 함께 이 사장을 만났다. K 사장에 따르면 이날 회동은 3시간쯤 이어졌다. K 사장이 전하는 이 사장의 발언 내용.
“영덕군을 도와줘라. 부안군에 수백억원을 투자했는데 부지 선정에 실패했다. 방폐장은 절대 위험하지 않다. 도와주면 지원금은 나중에 정부가 보전해준다. 방폐장이 유치되면 대규모 건설 물량이 생기고, S건설도 이 공사에 참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함께 참석했던 N 씨 등 영덕군 측도 건설 물량 등을 거론하며 K 사장의 투자를 유도했다. 이 사장을 만난 일주일쯤 뒤인 6월5일, K 사장은 N 씨가 지정한 통장에 1000만원을 넣는 것을 시작으로 영덕군의 방폐장 유치전에 동참했다. 16일과 17일 각각 1000만원과 2000만원을 입금하는 등 K 사장은 N 씨 등이 요구할 때마다 돈을 보냈다. 9월25일에는 “방폐장 건설을 반대하는 단체들의 일본 견학 경비가 필요하다”는 N 씨의 지원 요청을 받고 2000만원을 송금하기도 했다. 이렇게 4개월에 걸쳐 K 사장이 지원한 돈은 2억2600만원.
S건설 K 사장이 영덕군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한 영수증.
그런데 10월 중순, 방폐장 유치 경쟁에 나선 지자체 가운데 영덕군의 유치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덕군도 적극적으로 나서 유치전을 벌였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10월24일 김 군수는 ‘일금 10억원을 영덕군 방폐장 유치 신청을 위한 관계법에 의거, 홍보활동비로 사용해도 추후 보전금으로 처리할 것임을 확약함’이라는 내용의 확약서를 K 사장에게 써주고 지원을 요청했다. 김 군수의 확약서를 받아든 K 사장은 10월24일부터 11월1일까지 총 11회에 걸쳐 10억7800만원을 입금했다(입금 영수증 참조). 앞서 19회에 걸쳐 입금한 2억2600만원 등 K 사장이 영덕군 측에 전달한 자금은 모두 13억2000만원에 이른다.
그러나 K 사장의 풀베팅에도 방폐장 유치는 실패로 끝났고, 동해의 거점도시로 발돋움하려던 김 군수와 영덕군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대규모 건설 물량을 기대했던 K 사장도 마찬가지. 남은 것은 각자가 거머쥔 계산서를 정산하는 일뿐이었다.
이때부터 K 사장과 김 군수, 한수원 간에 갈등이 시작됐다. 먼저 K 사장이 확약서를 들고 김 군수를 다그쳤다. 김 군수는 한수원을 상대로 방폐장 유치와 관련한 각종 홍보비용 등에 대한 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방폐장 부지 선정 작업이 끝난 한수원은 “K 사장과 김 군수가 주고받은 돈은 한수원의 보전 기준과 원칙에 위배된다”며 보전 불가 입장을 통보했다. 한수원 최성환 부장은 보전 불가 배경을 2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지자체가 쓴 홍보활동비는 지자체 예산임이 증명돼야 한다. 사업절차가 공고된 6월16일에서 9월15일까지 써야 한다는 규정도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사업자가 정보활동비를 지원하더라도 주민투표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K 사장이 영덕군에 지급한 13억원 대부분은 사인(私人) 간 거래 성격이 짙을 뿐만 아니라 지급 시기(10월23일)도 문제가 있다.”
최 부장은 “영덕군뿐만 아니라 타 자치단체도 이런 식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홍보비 보전을 둘러싸고 자치단체와 한수원의 갈등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보는 중앙정부는 난감한 표정이다. 산업자원부 원전사업기획단 한 관계자는 “K 사장과 영덕군의 거래는 사인 간의 거래로 볼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원칙적으로 보전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K 사장과 김 군수는 정부의 이런 지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한다. “자금의 사용 시기나 출처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돈이 홍보활동비에 제대로 쓰였느냐가 판단 기준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K 사장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4차례에 걸쳐 한수원을 찾아가 항의했지만 한수원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김 군수도 1월 이희범 산자부 장관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는 등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방폐장 유치를 위해 영덕군이 만든 홍보물.
영덕군이 기업인에게서 빌린 13억원과 관련한 논쟁은 정치적인 문제와 법률적 문제로 나뉘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 논쟁의 핵심은 한수원 이 사장의 발언. K 사장에게 투자를 권유하며 건설 물량을 확보해줄 것이라는 약속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K 사장의 태도는 단호하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이다. 누울 자리도 보지 않고 발을 뻗었겠는가. 정부기관의 책임자(한수원 사장)의 확인 없이 내가 왜 가본 적(영덕)도 없고, 만난 적(김병목 군수)도 없는 사람에게 13억원을 투자했겠는가. 원금을 보전하고, 건설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투자한 것이다.”
이와 관련 한수원은 ‘주간동아’에 보낸 공문을 통해 “도와주면 지원금은 국가가 보전해준다는 말은 했지만 방폐장 건설과 관련해 S 건설에 건설 물량을 배려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한수원의 경비 보전 불가 방침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람은 김 군수. 그는 “방폐장을 유치,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의욕이 앞서 일을 추진하다 이런 처지에 빠졌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당초 김 군수는 방폐장 유치에 나섰던 경주나 포항 등과 달리 재원 마련에 한계를 느껴 포기하려 했다. 그런 그가 유치전에 뛰어들어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회한에 찬 김 군수의 말이다.
“주변에서 부추겼지만 당시 가용 예산이 5억원밖에 없어 유치전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산자부, 한수원 사람들을 만나니 일단 금융기관이든 개인이든 자금을 빌려서 홍보활동에 나서면 나중에 보전하겠다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여기저기서 자금을 빌렸다.”
방폐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영덕군에 홍보활동비를 지원한 기업인은 K 사장 외에도 서너 명이 더 있다. 김 군수도 사비를 털었다. 물론 모두 정부의 보전 원칙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한수원은 1월11일 경주를 비롯해 포항, 군산, 영덕군 등 방폐장 유치 경쟁에 나섰던 자치단체에 주민의견 수렴비 등 경비 보전 방침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영덕군을 제외한 나머지 자치단체는 2월2일 현재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한수원 사업전략처 사업관리실 한 관계자는 “4개 자치단체가 보전을 요구한 돈은 수십억원 규모”라고 할 뿐 구체적인 금액을 밝히진 않았다.
방폐장 부지 선정 작업이 끝난 지 3개월. 19년의 한을 푼 방폐장은 고도 경주의 품에 안겨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유치전에 나섰던 자치단체들은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