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맨 앞)이 1월26일 INI스틸 당진공장을 방문해 건설 중인 부두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INI스틸 당진공장 전경(오른쪽).
이날 정 회장이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INI스틸이 일관제철소 건설 사업을 공식 승인받은 뒤 당진공장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앞서 충남도는 1월16일 INI스틸이 지난해 5월 충남도에 신청한, 당진군 송산면 일대 96만평의 지방산업단지 지정을 승인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이 일관제철소 건설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셈.
잘 알려진 대로 일관제철소 건설은 현대가의 2대에 걸친 숙원사업.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쇳덩이부터 완성 차까지 만들 수 있는 수직계열화 추진을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제철소 사업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룹 안팎의 반대나 외환위기 이후의 변화된 사업 환경 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산 700만t 규모 시설에 5조원 투자
정몽구 회장이 일관제철소 건설의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 것도 아버지의 유업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은 일관제철소 건설의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던 원료 조달 문제 해결을 진두지휘,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초 정 회장이 직접 세계 최대 원료 공급업체인 호주 BHP빌리튼과 협상을 벌여 10년간 양질의 철광석 및 유연탄을 공급받기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
현대·기아차그룹은 약 5조원을 투자해 송산공단에 연산 7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2011년까지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철강산업 담당 애널리스트인 대신증권 문정업 연구위원은 “INI스틸의 일관제철사업 진출로 포스코 독점체제가 깨지면서 두 회사 간 경쟁을 통해 한국 철강산업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업계에서는 현대·기아차그룹의 일관제철사업 진출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자동차업계에서도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가운데 철강업체를 수직계열화하고 있는 곳은 없다”면서 정몽구 회장이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경쟁력 확보 여부 △공급 과잉 논란 △수직계열화에 따른 리스크 등이다.
하지만 현대·기아차그룹은 고로(高爐) 공법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므로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고로란 거대한 용광로를 뜻하는 것으로, 이 용광로 안에 철광석을 넣고 코크스를 태워 쇳물을 생산한다. 고철을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전기로와 달리 열연과 냉연 등으로 이어지는 일관 공정체제를 갖출 수 있고, 고품질의 다양한 철강재를 확보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고로 2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INI스틸 측은 “고로는 지난 100년 동안 끊임없이 개선돼온 공법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에 지은 설비가 가장 생산성이 높고, 따라서 경쟁력도 있다”고 설명한다. INI스틸이 예상하는 조강 t당 건설비는 약 700달러. 물론 포스코의 포항제철소나 광양제철소에 비해 높지만 포스코의 인도 일관제철소 건설비(t당 1000달러)보다는 낮다는 설명이다. 한보그룹이 이미 5조원 정도를 투자해놓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싸게 건설할 수 있다는 것.
5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비 조달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이익잉여금이 1조8000억원가량 쌓여 있는 데다 해마다 6000억~8000억원의 현금 창출이 가능하므로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최근의 호황을 근거로 한 것이고, 철강 시황이 나빠지면 투자비 조달을 위해 다른 계열사가 동원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이 경우 당연히 그룹 리스크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고로 공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료의 안정적 확보이다. 포스코의 한 임원은 “포스코의 지난해 원료 구입비가 제조원가의 48% 정도나 됐다”면서 “포스코가 인도 진출을 결정한 것이나 세계 철강업체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선 것은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협상력을 키우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INI스틸은 이에 대해 원료 확보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생각이다. 지난해 철광석과 원료탄이 급등했던 것은 수요 증가에 맞춰 제때 채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원료 업체들이 올해부터는 증산을 계획하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는 해도 INI스틸은 대형 철강업체와 달리 대량구매에 따른 이점을 누리기 힘들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현대·기아차 위기냐 기회냐
INI스틸 측은 또 세계 철강업체들의 M&A도 ‘속 빈 강정’이라고 반박한다. 2003년 기준 주요 철강사들의 세전이익률을 보면 미국의 US스틸이나 일본의 신일본제철 같은 대형 업체들이 각각 -1.9%, 7.6%에 불과한 반면 중형 업체인 대만의 차이나스틸과 중국의 바오철강은 각각 38.6%, 24.0%를 기록했다. 이들 업체의 조강 생산량은 1000만t 규모이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700만t 내외에 불과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공급 과잉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INI스틸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2004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1000만t 이상의 철강재를 수입했기 때문에 공급 과잉 논란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국내로 밀려들어오는 중국산 철강제품은 저급재인 데다 2010년 무렵이면 중국의 조강 수급이 균형을 이룰 전망이어서 중국산 수입으로 인한 공급 과잉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철강업계에서는 중국의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고 말한다. 중앙정부가 철강 수급 균형을 목표로 내세웠다고 해도 각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조강 설비를 증설하고 있으며 중국의 철강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결코 낙관만 할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수직계열화에 대한 우려는 주로 자동차업계 쪽에서 나온다. GM대우차의 한 임원은 “자동차 안전이나 환경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여서 자동차에 투자를 집중해야 할 판에 사업을 다각화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산업연구원 김주한 박사는 “경제논리로만 보면 INI스틸로서는 수직계열화에 따라 자동으로 수요처를 확보하기 때문에 경쟁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는 데다 자동차 경기가 나빠지면 철강 경기도 따라서 하락할 수 있어 그룹 전체적으로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철강업계에서 제기하고 있는 우려는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에 대한 거부감의 발로일 수 있다. 물론 현대·기아차그룹 입장에서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도 있다. 일관제철사업이 현대·기아차그룹에 위기가 될지, 또는 기회가 될지 현재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국내 철강산업은 포스코와 현대·기아차그룹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