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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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코박은 살림살이 어렵고 징하지라”

  •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입력2006-11-22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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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에 코박은 살림살이 어렵고 징하지라”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삶을 일궈온 사내다. 서해 갯바람에 맨가슴 맡기듯 달랑 두 주먹 쥐고 세상을 제 몸 하나로 걸어온 사내는 흙과 비비며 사는 일을 퍽이나 사랑하는 농사꾼이요, 그 사랑 덕에 시인이 된 사람이다. “먼 얘길 들을 거이 있겄소?” 심상하다 하나 신산하게 느껴졌던 그의 인생을 들으러 가는 길이 쉬웠을 턱이 있나. 서울에서부터 5시간을 달려 변산 푯말이 보일 즈음 그가 다시 전화를 했다. “저―그, 격포까지 오면 다 온 거여요. 노을맞이 축제 장마당에 있응께 집행부에서 (날) 찾으씨요.”

    ‘변산면 마포리 종암 사시는/ 금년 나이 여든다섯의 남백산 씨는/ 비루먹은 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변산 들러 격포 채석강 찾아오는 관광객들/ 토요일 일요일이면 자가용 몰고/ 줄줄이 종암 고개 넘어오는데/ 팔구십 백 키로를 신나게 밟고 오는데/ 오늘은 남백산 씨 달구지에 걸렸습니다./ 뒤에서 죽어라 빵빵대도/ … 이랴 쪄쪄 - 바쁘면 늬가 바쁘지 내가 바쁜가?/ 종암 고개 천천히 올라갑니다./ 구십 고개 그렇게 올라갑니다./ 성질 급한 차들/ 한 십 리 뻗쳐 있습니다.’

    채석강을 지나 ‘늬들이나 바쁘쟈?’는 듯 3단 기어 위로는 필요 없을 속도로 주행하는 차들을 만나자 그의 시 ‘남백산 씨’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난다. 가을의 끝을 마저 보낸 겨울 문턱, 한 해 땀 흘린 주민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여느 농어촌처럼 격포도 풍악소리가 한창이다. 청홍 채복을 두른 풍물패 중 맨 앞에 선 키 큰 상쇠재비가 그인 모양이다. 이우는 오후 한 뼘 해에 흰 고깔이 눈부셔 얼굴이 더 검어 뵈나. 왔노라 손짓하자 한 바퀴 더 마당을 돈 후에야 곁을 준다. “점심은 드셨어요? 전 우리 패허고 해야 허는디….” 수식 없는 짧은 말이 아무래도 난데없는 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58년 개띠 … 농민 어려움 걸쭉한 사투리로 표현

    초등학교 군악대 연주도 끝나고 지역 트로트 가수들의 차례도 끝나 잔치마당이 시들해가는 사이 따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만났다. 꽹과리 열심히 두들긴 쥔은 피곤 때문일 것이요, 먼 길 달려온 객은 서운 반에 시장 반을 타 제각기 막걸리 한 사발씩 걸쳤음은 물론이다. 그의 책 ‘모항 막걸리 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디새집)에서 ‘변산면 면서기를 하다가 이 동네서 한 잔, 저 동네서 두 잔, 어느 날은 장난 삼아 세어보니 그날 마신 막걸리가 백 잔하고 따로 석 잔이더라!’라고 했던 마을 사람 서금용 씨만큼은 아니더라도 솜씨 좋았던 아버지와 술로 한평생 산 큰형님처럼 그 또한 애주가 아니던가. 불콰한 얼굴로 그가 모는 노란색 16인승 승합차를 탔다. 승합차 운전은 농사 외에 그가 하는 또 다른 일이다.



    “땅에 코박은 살림살이 어렵고 징하지라”

    저녁나절의 모항마을 풍경. 이곳에서 나고 자란 박형진은 지금껏 이곳을 떠나지 않고 농사짓고 시 쓰면서 살고 있다(좌).<br>격포 노을맞이 축제에서 지역 풍물패 공연으로 한바탕 신이 오른 시인 박형진(우).

    “농사만 지어서 먹고살 수만 있으면 얼매나 좋겄어요. 제가 지금 논 한 필지에 밭을 논보다 좀더 부치는데 농사만으로는 우리 식구 못 멕여 살립니다. 자급자족률이 한 60%나 되까? 긍게 제 안식구가 어린이집 선생을 허고 전 아침저녁으로 운전기사를 하는데 그래도 살림이 살얼음 밟듯 안 허요.”

    농민 후계자자금을 융자받아 논을 사서 아직 대출금 갚을 일도 몇 년이나 남았다. 아내(이미자·48)와 그가 변산 공동체마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 일로 받는 돈은 월 100만원. 그중 그의 품삯은 30만원이다. 옷은 얻어 입고 보일러를 놨어도 기름이 아까워 손 재게 놀려 나뭇짐 해다 때고 산다. 먹는 일이 사람 사는 전부라면 걱정이 덜하겠으나 공과금이며 교통비, 아이들 치다꺼리에 엔간히 품이 들 것인가. 드는 나이에 비례해 날아오는 경조사 고지서가 버거워 형님에게 간혹 미루기도 하는 살림이어서 식구 중 아픈 이가 있으면 그만한 낭패가 없다. 담배도 끊었다. 살면서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이라곤 오직 한잔 술이 그리울 때뿐, 원고지 대신 도시에서 남아도는 이면지나 쓰다 만 노트 나부랭이에 글을 써온 지도 오래다.

    차는 변산 끝 산굽이를 다시 돌다가 그림처럼 바다에 폭 안긴 작은 마을로 접어든다. 58년 개띠생인 박형진이 나고 자라 일가를 이루고 올 가을걷이도 손 턴 전라북도 부안군 도청리 모항. 그가 책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에서 ‘띠목쟁이’로 동리 사람을 일컫던 바로 그 띠목마을이다. 좁지만 등대도 있고 방파제도 있어 깐에는 소신 있는 항구 마을로 주민 절반은 물일을 하고, 남은 절반은 농사를 짓거나 딴 일로 먹고 산다. 그림처럼 보이는 바다라고 만만히 보면 큰코다칠 일이다. 음력 6월 바다인 육수기에 덕재(병어) 한번 잡아보려고 ‘꽁댕잇배(꽁지배)’를 띄웠다가 센 파도에 그만 목선이 가라앉아 “너그나 살어라”며 ‘후다(배 뚜껑)’를 벗겨 아들과 손자에게 던져줬으나 “밤새 생사를 넘나드는 곡경을 치르며 일가족 3대가 어둠 속에서 서로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갑선이 부자 이야기며, 자맥질 선수 석태가 그 바다에 젊디젊은 몸을 주다가 술에 먼저 가고 만 일 같은 소소한 바닷가 일상이 죄다 그의 책에 씌어 있다. 시인의 감수성이 오죽할 텐가. 그러므로 박형진이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도 책으로 인해 겪은 일이다.

    “‘모항 막걸리 집…’ 냈을 때 무척 힘들었죠. 한가족 겉은 이웃이라 다 실명으로 쓴 거이 동티가 안 되야부렀소. 친구며 이웃이 다 난리, 그런 난리가 없었소. 너거 집 안방에서 죽어버리겄다꼬 맨날 전활 해쌌고 몽땅 불질러 버리겄다 해싸니 사람이 병이 납디다.”

    어찌어찌 무마하고 기억이 무뎌질 만큼 세월도 지났으나 그래도 옛날 마음만이야 하겠느냐는 시인의 아픔은 글에도 선연하다.

    ‘…이런 글쓰기 역시 별 볼 게 없다. 일년 열두 달을 두고 들어오는, 기껏 한두 번의 청탁글로야 언감생심, 처음부터 호구를 삼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나같이 복 없는 놈은 책을 한 권,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내놓아도 대박이 터지질 않는다./ 대박? 대박은커녕 허락 없이 함부로 남의 이야기나 들추어낸다고 대박살을 맞을 뿐이다.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 쓰는 글에 무슨 깊은 것이 있다고 사람들이 읽어줄까. 농민들의 어려운 삶을 글로 드러내보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치기스러운 허욕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혼자 있을 때마다 속일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다.…(부안21. 2005. 4)’

    중1 중퇴가 학력의 전부 … 농민운동 하다 등단

    “땅에 코박은 살림살이 어렵고 징하지라”
    사실 그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책을 읽고 나서였다.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 7편을 실은 후 첫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를 냈고 이태 지나 산문집 ‘호박국에 밥 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 2001년에는 두 번째 시집 ‘다시 들판에 서서’, 2003년에 산문집 ‘모항 막걸리 집…’을 썼다가 10년 만에 옛 글에 새 글들을 보태고 다듬어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을 낸 것인데 과문(寡聞)한 독자가 비로소 처음 박형진의 글맛을 보았던 것.

    “농민운동 하다가 만난 시인들 덕분에 등단허게 되야ㅆ어요. 부안 농민회 사무실 바로 아래 전교조 부안지회가 있었는데, 같이 운동하던 이들이라 술잔 나눔시로 김영춘 씨(당시 전교조 해직교사)를 알게 됐는데 그 형이 여러 사람에게 제 시를 돌렸어요. 김용택 형이 창비로 시를 보냈다 하더만요. 80년대 우리나라 농촌 환경은 농사꾼은 농민운동 하게끄럼 되여 있었어요. 없이 사는 농민들헌티 매칼으ㅄ이 수세나 받아가는 정부는 뜯어고쳐야 했응게…. 농산물 제값받기운동도 그때 농민들이 안 나섰으믄 우찌 됐을지 모르겄소. 지금도 농촌살이는 어렵기 매한가지여라.”

    부안군 농민회 사무국장을 끝으로 91년 ‘운동’을 그만두었다는 박형진은 중학교 1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그런 그의 글발에 탄복하는 이가 또 있으니 변산 공동체마을에서 함께 농사짓다 근년에 서울로 터를 옮긴 철학자 윤구병 씨다.

    ‘…박형진이 이번에도 발문을 써달라고 왔다. 내가 물었다. 너 먹 갈아왔냐? 먹은 웬 먹이요. 붓글씨로 쓸라요? 아니 발바닥에 먹 듬뿍 묻혀서 한지에 꾹 누르면 그게 발문(발무늬) 아니겄냐? 농사일도 바뻐 죽겠는데, 나 못 쓰겠다. 아따 놓고 갈 틴게 알아서 허쑈.…’ 그렇게 부탁을 받은 발문에서 윤구병은 이렇게 썼다. “내가 박형진이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석죽은 대목이 있으니 바로 이자의 글솜씨다. 글솜씨가 익혀서 얻을 수 있는 장시간 제도교육의 산물이라면 내 가방끈이 지 가방끈보다 몇 곱절은 더 윗길이어야겠지. 하지만 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박형진의 그 능청스러운 말맛을 도무지 흉내낼 수 없다.…(이자의 글발은) 지지리도 가난한 갯마을 뱃놈들 뚝심이 줄줄이 구불텅구불텅 신새벽 좆 서듯이 울끈불끈 솟는구나.”

    천원짜리 한 장 없어도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

    하여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서점으로 달려갈 수밖에. 책을 덮자 곧장 달려가고 싶었고, 만나면 그 손을 끌어 흙내부터 맡고 싶은 이가 되었다.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남은 풍경을 고스란히 끄집어내주는 책. 잃어버린 풍경, 잃어버린 이웃, 잃어버린 말들이 잔치를 벌이는 책이다. 고너리와 딩팽이, 중하가 적당히 섞인 잡젓 사이 팔뚝만한 삼치 두세 마리를 장아찌 박듯이 박아 두서너 달 푹 삭힌 삼치젓, 썩은 고구마를 버리지 않고 앙금내어 만든 ‘이빨이 덧놀도록 차지고 맛난’ 고구마 개떡 같은 잊혀진 음식들을 되살려놓은 것도 다 박형진의 글발일 터. ‘시뿌장스럽다(마음이 차지 않아서 시들하다)’거나 ‘굴풋한(배가 고픈 듯한)’, ‘알음짱하고(눈치로 넌지시 알려주고)’ 같은 전북 사투리가 발라내는 글맛을 통해 60, 70년대 헐벗고 못 먹던 그 시절의 입맛을 다신 이들은 책 중간 딸내미 이 잡는 대목 ‘핏풍은커녕 좆풍도 아니다’에 이르러 파안대소하고야 만다.

    “형편도 형편이고 중학교 댕기보이 싱거워 때리치아뿟소. 큰형님 밑에서 농사 배우다 열아홉 살 때 딱 한 번 띠목을 떠나 서울로 갔는데, 늦은 봄에 떠나 설 쇨라고 내려왔으니 일년도 채 못 채왔지요. 유신 말기에 데모허는 데 쫓아댕기다가 알게 된 누님 한 분이 스프링노트 4권에 신동엽 시인의 ‘금강’ 전문(全文)을 빽빽이 적어줍디다. 그걸 읽다 보니 고통스런 환희랄까 격동 같은 것이 가슴을 뻑 허고 채우더라고요. 못 먹던 소주를 두 병 마시고 밤거리를 나서니 비가 오데요. 미친놈처럼 비를 맞고 밤새 부천을 헤맸는데 속에선 불이 납디다.”

    “땅에 코박은 살림살이 어렵고 징하지라”

    박형진이 흙벽돌 한 장까지 직접 찍어 만든 집. 솜씨 좋은 것은 돌아가신 부친을 닮았다.

    ‘금강’으로 문리를 틔웠달까, 문학수업을 따로 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는 몇 해 전 죽 살던 바닷가 집에서 근동으로 이사했다. 바다와 인접한 산자락에 터를 사서 한 5년 홀로 흙벽돌을 찍어 만든 집이다. 붉은색을 아직 못다 비운 곶감이 주렴(珠簾)처럼 처마에 매달린, 쓰다 만 것들을 가져다 닦고 이었음이 분명할 나지막한 예쁜 집에는 이즈음 여섯 식구 중 넷만 남았다.

    ‘큰누님 말마따나 거미새끼 같은 것들을 서울 백사지 땅에 보내놓고 색달븐 반찬 한 가지만 생겨도 딸애들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는(휘유~), 이런 애비라도 보겠단다고 또 몇 시간씩 시달리며 이번 설에도 내려올’ 그의 두 딸(푸짐이·23, 꽃님이·21)이 빠진 까닭이다. 푸짐이는 윤구병 씨가 운영하는 ‘민족의학협회’를 다니고 있고, 꽃님이는 보리출판사 직원이다. 정규 중학교 과정을 마친 아루(17)만 빼고 보리(8)까지 아이는 모두 대안학교를 보냈는데, 이는 시인의 교육 의지이자 한편으론 아이들의 즐거움이었다. 젓니갈이에 충치로 치과 갈 일이 태산인 막내의 똥도 예뻐 책에 그대로 사진 싣는 사내. “어이, 우리 또 하나 낳아도 이렇게 이쁠랑가? 어떻게 하나 더 그냥 낳아보까?” 길바닥에서 막내를 직접 받은 후 ‘저렇게 이쁜 것을 낳아놓은 여자’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했던 아내와 이 저녁도 노란 승합차를 몰고 변산 고갯길을 넘고 있는 사내.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찾아들었다.(입춘단상)’

    천원짜리 한 장 없이도 얻어온 ‘벨붕어(병치)’ 댓 마리를 손수 배 긁어 안주로 놓고, ‘글라스’에 소주 듬뿍 부어주던 사내가 박형진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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