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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갈등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런저런 네트워크로 엮인 사람이 끼리끼리 즐기는 서비스다. 그런데 지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도대체 왜 심각한 정치 갈등이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일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네트워크 ‘강도’다. 우리가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시원한 맥주도 한잔하는 지인은 네트워크 연결 강도가 세다. 이런 지인의 경우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슷할 공산이 크다. 애초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 사사건건 부딪쳤다면 친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반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마주치는 이른바 ‘페친’은 네트워크 강도가 훨씬 약하다. 어렸을 때 또는 학창 시절 잠깐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떨어져 지낸 지 오래된 사람이거나 한두 번 지나친 인연이라도 페이스북에서는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정치적 견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2015년 이탄 박시(Eytan Bakshy) 등이 ‘사이언스’에 기고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일반적으로 페이스북에서 얻는 많은 정보는 정치적으로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약한 연결 관계인 지인이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로는 가짜) 뉴스를 전하거나 주장을 펼친다. 이런 정보에 한쪽이 발끈하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 또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의견에 발끈하게 됐을까. 솔직히 말하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겼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 않다. 대다수 사람은 다른 사람, 사물, 견해를 접하면 먼저 ‘좋고(내 편)’ ‘싫고(네 편)’를 판단한 뒤 나중에 그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연구 결과가 그렇다. 다마지오는 ‘좋다’ ‘싫다’ 같은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을 일으키는 대상을 아주 빠른 속도로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뇌 상태를 관찰했다. 보여주는 속도가 너무 빨라 실험에 참여한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봤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뇌의 한 부분인 편도는 활성을 띠었다.
뇌 깊은 곳에 자리한 편도는 공포나 분노의 정서 촉발에 관여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실험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공포나 분노의 느낌부터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그런 공포나 분노의 느낌에 맞춤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나중에 덧붙였다.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였다.
앞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노 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은 추도식이 열리는 와중에 맥주잔을 부딪치며 웃는 문 대통령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반대로 문 대통령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만큼 간절하게 바라는 지지자들은 대통령에 대한 비판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다. 일단 감정이 앞서면 그다음 논리는 그 감정을 합리화할 뿐이다.
우리가 애초 이렇게 진화해온 데는 이유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오랫동안 덩치가 큰 다른 동물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조차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다. 당연히 순간순간이 생존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수상한 움직임이나 갑자기 맞닥뜨린 낯선 동물의 첫인상을 포착해 재빠르게 피하는 능력이 필수다.
사회 불통 강화하는 AI 기반 뉴스 추천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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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한민국은 아프리카 사바나가 아니다. 한쪽이 죽어야만 다른 쪽이 사는 그런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이해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견해가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게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이해, 공감, 조정을 통해 공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허나 전망은 비관적이다.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은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개인 취향에 맞게 뉴스를 추천하는 서비스다. 구글, 네이버 등이 앞다퉈 인공지능 기반 뉴스 서비스를 더욱더 확대할 예정이다. 인공지능이 보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보여주는 일이 왜 문제일까.
인공지능의 학습능력이 뛰어날수록 어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뉴스에만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사람은 연예인 스캔들 같은 선정적인 가십에 집중적으로 노출될 테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정치적 견해만 접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소통 가능성은 더욱 적어질 게 뻔하다.
더구나 기업의 인공지능은 오직 한 사람의 정체성을 ‘소비자’로만 간주한다. 그 사람은 평소에는 연예인 스캔들에 호기심을 갖는 뉴스 소비자지만, 때로는 정치인의 횡포나 부당한 사회악에 대항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갈 수 있는 공적 시민이다. 하지만 기업의 인공지능이 과연 그런 복합적이고 변화하는 정체성을 포착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지금 이 글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읽는 독자는 누구일까. 안타깝게도 이런 사정을 다 알 만한, 그래서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